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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01 제목 : 이야기 성경 : 역대하 25장 14-16절 주제 : 믿음과 구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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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01 제목 : 이야기 성경 : 역대하 25장 14-16절 주제 : 믿음과 구원

필명 이일기 2018. 12. 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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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01

제목 : 이야기

성경 : 역대하 2514-16

주제 : 믿음과 구원

 

[표준새번역]

역대하 25

아마샤가 왕이 되었을 때에,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스물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여호앗단은 예루살렘 사람이다.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으나, 마음을 다하여 하지는 않았다.

 

왕권을 확고하게 장악한 뒤에, 그는 부왕을 살해한 신하들을 처형하였으나,

처형받은 신하의 자녀는 죽이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가 모세의 책, 곧 율법에 기록된 말씀을 따른 것이었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자녀 대신에 처형받아서는 안 되고, 또 자녀가 아버지 대신에 처형받아서도 안 된다. 오직 각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에 따라 처형받아야 한다" 하고 말씀하신 주의 명령이 있다.

 

아마샤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그들이 소속된 가문별로 군대 단위로 조직하고, 그들 위에 군대 지휘관인 천부장과 백부장을 임명하여 세웠다. 이 군대 조직에 편성된 사람들은 스무 살 이상 된 남자들로서, 모두 삼십만 명이나 되었다. 이 사람들은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장정들이었다.

이 밖에도 그는 은 백 달란트를 주고,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용감한 군인 십만 명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가서 말하였다. "임금님, 임금님께서는 이스라엘 군대를 데리고 가지 마십시오. 주께서는 북왕국 이스라엘, 곧 에브라임 자손과 함께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임금님께서 북 이스라엘 군대를 데리고 출동하시거든, 힘써 싸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임금님이 대적들 앞에서 엎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임금님을, 이기게도 하실 수 있고, 지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물었다. "북 이스라엘 군인을 고용하느라고 지불한 은 백 달란트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대답하였다. "주께서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임금님께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샤는 에브라임에서 온 군인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은 유다 사람에 대하여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마샤는 용기를 내어 출병하였다. '소금 계곡'에 이르러서, 세일 자손 만 명을 죽였다.

유다 군대가 또 별도로 만 명을 산 채로 붙잡아서, 절벽 뒤로 끌고 올라가, 그 밑으로 떨어뜨리자, 그들의 몸이 으스러졌다.

 

그러는 동안에 아마샤가 전쟁에 함께 데리고 출동하지 않고 되돌려 보낸 북 이스라엘 군인들은, 사마리아와 벳호론 사이에 있는 유다의 여러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을 삼천 명이나 죽이고, 물건도 많이 약탈하였다.

 

아마샤는 에돔 사람들을 학살하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상들을 가져 와서 자기의 신으로 모시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하였다.

이 일로 주께서 아마샤에게 크게 진노하셔서 예언자 한 사람을 보내시니, 그가 가서 아마샤에게 말하였다. "이 신들은 자기들을 섬기는 그 백성들을 임금님의 손에서 건져 내지도 못하였는데, 임금님께서는 이 신들에게 비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예언자가 이렇게 말머리를 꺼내는데, 왕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우리가 언제 너를 왕의 고문으로 추대하였느냐? 맞아 죽지 않으려거든 그쳐라!" 하고 호통을 쳤다.그러자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그쳤다. "임금님께서 나의 충고를 받지 않고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임금님을 망하게 하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유다 왕 아마샤가 참모들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항할 모의를 하고, 예후의 손자요 여호아하스의 아들인 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왕에게 전령을 보내어서, 서로 직접 만나 힘을 겨루어 보자고 제안하였다.

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왕은 유다의 아마샤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회답하였다. "레바논의 가시나무가 레바논의 백향목에게 전갈을 보내어서 백향목의 딸을 며느리로 달라고 청혼하는 것을 보고, 레바논의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은 일이 있다.

너는 에돔을 쳐부수었다는 것을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겨 자랑하면서, 건방지게 우쭐대지만, 차라리 네 궁전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별 탈이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너는 네 자신과 유다를 함께 멸망시킬 화근을 스스로 불러들이느냐?"

그가 이렇게 말하여도 아마샤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유다 사람들이 에돔 신들의 뜻을 물으므로, 하나님께서 유다 사람들을 여호아스의 손에 넘겨 주시려고, 아마샤의 마음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왕이 올라와서, 유다의 아마샤 왕을 맞아 유다의 벳세메스에서 대치하였다.

그러나 유다 군대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하여, 뿔뿔이 흩어져 자기들의 집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왕은 벳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요 요아스의 아들인 유다의 아마샤 왕을 사로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들어 왔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에 이르기까지 사백 자 길이의 성벽을 허물어 버렸다.

그는 또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오벳에돔이 지키고 있는 모든 금과 은과 그릇들을 약탈하고, 왕궁의 보물 창고를 약탈하고, 사람까지 볼모로 잡아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유다의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왕은 이스라엘의 여호아하스의 아들 여호아스 왕이 죽은 뒤에도 열다섯 해를 더 살았다.

아마샤가 다스리던 기간에 일어난 다른 사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다와 이스라엘의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마샤가 주를 따르다가 등지고 돌아선 뒤에,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아마샤는 라기스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라기스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거기에서 그를 죽였고,

그의 주검을 말에 싣고 와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하였다.

서론

세상에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곳이나 어떤 사람들도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경기전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경기전과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조경묘가 있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태종 10(1410)에창건하였다.

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왕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서 태조의 어용을 봉안하였으며, 태종 14(1414)에 건립되었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은 창건 당시에는 어용전이라 불리었는데, 태종 12(1412)에는 태조진전이라 하였다가, 세종 24(1442)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하였다. 선조 25(1592) 임진왜란으로 네 곳에 있었던 태조 어용전은 전부 소실되었다. 경기전은 선조 30(1597)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6(1614) 11월에 중건되었다.

경기전은 옛 전주부성내 동남쪽에 광대한 면적을 점유하고 있었으나, 일제 때에 그 서쪽을 분할하여 일본인 전용인 수상소학교를 세움으로써 경기전 절반 이상의 땅을 상실하였으며, 부속된 건물은 이때 거의 철거되었다. 풍남초등학교가 있었고 최근에는 그 모든 면적을 복원 하였다. 현존 건물인 전각은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서, 전면에 하마비,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등이 있다.

 

경기전에 봉안된 어용은 경주 집경전본을 모사한 것이었는데, 세종 24(1442)7월에 집경전의 어용과 함께 개화하여 동년 10월에 봉안했다.

 

현재 경기전 어진은 고종 9(1872) 9월에 개화한 것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빨리 내장산에 피난하였다가 정읍, 태인, 익산, 용안, 임천, 은산, 정산, 온양, 아산을 거친 다음 강화도, 안주를 경유하여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봉안되었다.

그 후 어용은 여러 번의 수난을 겪었는데, 즉 인조 14(1636)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성에 피난했다가 돌아온 일이 있었으며, 영조 43(1767)이른바 정해대재 때는 전주향교 명륜당에 긴급 피난한 일이 있었으며, 고종 31(1894)에는 동학군의 전주입성으로 한때 위봉산성에 피난하기도 했다. 경기전에 인접한 북쪽에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 공과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가 있다.

조경묘는 영조 47년에 창건하여 영조가 친히 위패를 썼으며 동학혁명군이 전주부성에 입성할 때 태조의 영정과 함께 위봉사의 행궁에 옮겼다가 7월에 다시 전주로 옮겨 놓았다.

 

남고산성

전주남고산성은 교대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고산의 자연형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산성이다. 후백제때 처음으로 쌓여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산세나 지세로 봐서 그 이전부터 성터였을 가능성이 많다는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고덕산 줄기에 쌓아 놓은 이 산성은 조선왕조 순조때 수축하여 남고종을 두었다. 이 성은 효종때 설치했다는 중진영과 숙종때 쌓았다는 위봉산성과 함께 향토방어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 산성 안에는 현 남고산 앞쪽에 남장대 뒷편에 북장대를 두고 남장대 아래 서쪽 골짜기에는 군기고와 화약고 등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산성별장 1명에 장관22명을 비롯 군인 14백여명이 주둔했다고 하니 규모의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다.

남고산성의 평면은 불규칙한 제형을 이루는데 중앙의 북측에 위치한 각이 267.5m 높이이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수구가 있는 서북변은 자연규암층을 이용하고 있다. 동북변은 산능을 따라 약 800m 길이이고 동변은 길이 약 480m, 동변 역시 283.8m 높이의 동남봉과 254.4m 높이의 서남봉 사이의 능선을 연결하는데 길이 약 850m, 서변은 중앙에 수구가 있는데 서남봉에서 수구까지는 약 320m, 수구에서 만경대까지는 200m, 만경대에서 북방 남고산까지는 약 300m이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약 2950m에 이른다.

남고산에는 남고사를 비롯한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 등 3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앙의 만경대 남쪽 벼랑에는 고려말 충신인 정몽주가 쇠퇴해가는 왕조의 한을 읊었다는 시가 새겨져 있다. 또한 만경대의 수령 5백년된 만인송은 바위틈에 자라면서 오랜 흥망속에 정절을 지키고 있다.

 

눈뫼 허웅 이사장 영전에 (朴馨丘)

멀리서 자식 와도

더 멀리서 손녀 와도

 

밥 한끼 차릴 수 없어

맨 입으로 보내고

그립고, 그대 생각에

눈물만 머금는다.

 

허 웅/그립고, 그대 생각에

 

눈뫼 허웅(許雄.86)은 먼저 간(2001.11) 그립고, 그리운 부인 백금석 여사 곁으로 26일 오전 1013분 홀연히 떠났다. 맏아들 황(서울대 교수), 둘째 아들 원욱 (건국대 교수) 딸 혜련, 혜숙 등 유족 22녀가 빈소를 차린 서울 아산 병원 영안 실 33. 그의 영전에 마음의 흰 국화 한 점을 놓는다. 슬프다. 눈뫼를 다시 만 날 수 없는 이 현실에 나는 당신의 거룩한 생애 마지막을 우러른 지난해 신문로 한글회관의 영상을 돌아보며 덧없는 무상을 반추해 내린다. 이제 유명을 달리 하시

니 눈뫼와 더불어 우리말 글의 의욕적인 발전을 위해 담론하며 투쟁해온 힘과 열기가 차단된 느낌에 더욱 충격을 크게 한다. 고인의 발인은 30일 오전 8. 우리를 더욱 외롭게 하는 눈뫼. 평생을 국어 국문학에 헌신하는 동안 그 흔한 수필집 한 권 손질해 발간할 여유가 없었던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서 종로구 신문로 한글회관까지 바쁜 삶으로 일관해 왔다.

1918녀 경남 金海 출신으로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외솔 최현배 교수를 통해 국어학을 연구했다. 광복 후 부산대, 성균관대, 1954년에는 연세대 교수로, 그리고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1957-84)로 중세 국어에 몰두해 언어학 이론 연구에 젊을 연소하고 정년 퇴직했다. 정부는 26 일 그의 영전에 평생을 빛내온 업적을 기리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눈뫼는 이밖에 국민훈장모란장(1984), 외솔상(1973), 성공학술문화상(1986). 세종문화상(1990), 주시경학술상(1993) 등 큰상이 많았다.

눈뫼는 삶의 저술에 바쳤다. 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의 주해서의 발간을 비롯해여러 이론서를 간행했다. 1975우리 옛 말본15세기 우리말 문법을 총체적으로 공식 발됐다. 우리말 음운론에 대한 연구로는 한국 최초의 언어학 저서로 언어각 개론(1963) 국어 음운론(1964)이 있다. 1983년에 내놓은 국어학은 우리말의 구조주의 연구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세상은 눈뫼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한 흰샘 주시경(周時經)이 국어학에 주춧돌을 깔았으며, 외 솔 최현배(崔鉉培)는 그 위에 건물을 세웠고, 눈뫼 허웅이 마무리 구실을 했다'눈뫼는 1970년부터 34 년 간 한글학회를 종신회장 겸 이사장으로 맡아 각종 언어문화사업을 전개해 한자혼용 주장자들을 설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눈뫼는 한글학회 가족들과 한글을 위해 협력하는 단체나 개인을 찾아 지원했으며, 정기 간행물, 관계 저술 또는 논문, 그리고 이의 연구 행사 등 열심히 격려하고 도와 왔다. 눈뫼는 그렇게 한글 지킴이, 한글 사랑, 겨레 사랑을 위해 그 순수성과 본디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낌없이 그의 투지를 기울여 한글문화 창조운동을 간단없이 일구어 왔다. 이는 곧 우리문화의 개척과 창조를 향한 배달겨레의 밑거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눈뫼는 항상 그 자신의 역부족을 개탄했다. 국운의 신장과 겨레의 생활 방식이 윤택해지면서 우리 것에 대한 훼손과 파괴에 서슴없이 외래문화에 휩쓸려 마음 깊게 그를 우울하도록 했다. 세종대왕의 성덕을 누구보다도 우러르는 눈뫼. 오늘의 여과되지 않는 저질 외래사조와 잔혹한 폐습과 사회악의 노도질풍에도 세계문화와 나란히 무대의 중앙에서 개방과 국제화의 물결을 타고 국력의 원천을 과시하는 정신 또한 겨레문화의 주체성을 극명히 발현해준 대왕의 성덕 때문이라며 감사와 환희를 늘 잊지 않았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예지에 의의 있게 아름답게 생성된 우리 글을 꺼리며 간판에서나 문장에서 외국어의 남용으로 슬기로운 우리 말 글을 소중히 가꾸려는 국민의 참 정신과 의욕을 좌절하게 한다. 우리 말 글은 지금까지 우리 것을 값지게 받들어온 눈뫼와 그 운동권에 국한된 사명이요, 의무로 밀려 왔으나 이제는 한글의 앞날이 더 형극의 길이 되지 않도록 고인의 빛나는 유지를 이어 받아 기르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글 전용을 위한 여러 토론회에서 아직 한글이 천시되는 한자 혼용의 강력한 주장에 조우되곤 했다. 눈뫼 이사장과 남광우(南廣祐. 문박촵한국어문교육연구회장촵한국한자검정회장)) 교수와의 치열한 대국은 유명한 일화로 남는다. 교수는 주장했다. `한글세대는 의미 없는 무용지물이다. 신문 한 장 읽지 못해 일터에서 잉여인간으로 밀린다' 학교에서의 문맹 아닌 문맹을 양산해 민족정기를 황폐화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교수는 외국의 최신 이론을 도입한 교육방법 개

선책이 국어교육을 질식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일본의 초등학교 한자교육 성과에 따른 우리 젊은 세대의 국제적 지능지수 저하를 시사할 뿐이다. 교수의 결론은 `우리의 한글 세대이는 영원히 보상될 수 없는 희생이다. 일부의 무지와 고집만으로 강제되고 실행되는 한자 말살주의로 우리 말 우리 문화를 더 퇴화시키지 않기 바란다'

눈뫼는 한자 혼용주의 주장에 그 대답이 언제나 짧았다. `우리 글만으로 쓰인 의미를 아무 불편 없이 읽고 있는데, 왜 굳이 한자가 필요한가?' 그렇게 인자한 모습... 차게 누워 한 마디 말이 없다. 참으로 온순했다. 이제 침묵한 채 떠나버린 눈뫼. 눈뫼는 그렇게 바람과 구름 따라 함께 있을 곳을 찾아갔다. 세상은 아직 눈에 덮였고 당신은 그 뫼에 머문다... 글을 쓰는 우리는 남아 당신의 경륜과 결단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생전의 지혜와 용기를 그리워한다. 우리 글을 위해 하늘과 대지에서 마음을 합쳐 당시의 한글에 대한 정열! 당신의 당부 말씀 실현해, 하나의 금자탑을 세우려느니.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던 사람들은 당신이 닦아 놓은 한글 성새 위를 헛디딤 없이 착실히 힘차게 지켜나갈 것이다. 부디 고히 잠드시기를  

 

본론

그런데 그 많은 이야기 중 엄청난 이야기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본문 아마샤 왕의 생애 이야기

20021110일 주일에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전도하자는 말씀이었습니다만 아마샤 왕의 생애 이야기가 나와 있는 251-27절내용으로 아마샤의 이야기를 우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 말고도 성서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그 이야기에는 어떤 목적이나 뜻이 있습니다.

성서도 목적과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이야기)와 하나님의 구원(목적 또는 뜻) 그리고 믿음(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

성서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깨우치며, 기록한 뜻에 따라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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