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블로그
20071014 제목: 야곱이 받은 사랑의 목적 로마서 9장 1-18절 본문
20071014
제목: 야곱이 받은 사랑의 목적
로마서 9장 1-18절
하나님은 그의 약속(계획, 섭리)에 따라
그의 자비(사랑)에 의하여 선택한 자에게
그의 능력을 주시어
그로 하여금 자신을 전파하도록(믿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다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으로 맹세했던 것과 일맥 상통)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자기와 함께 계시며 자신의 생각을 다 아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의 진실성을 입증)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따라 났으며 언약과 약속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과 영광(하나님의 영적인 빛으로 그의 기운과 능력과 영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나타나셔서 임하던 그 영광이며(출 24:16, 17), 성막을 덮었던 영광이며(출 40:34-38), 지성소의 시은좌에 나타난 영광이며(레 16:2), 성전을 가득 채웠던 영광이다(왕상 8:10, 11;대하 7:1, 2;겔 1:28).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고후 3:7)이다)과 언약들(시초, 보존, 약속, 율법, 왕국의 연약, 즉 이스라엘 민족)(백성)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이 구원자가 되심)과 율법을 세우신 것(언약의 보증,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게 하는 것)과 예배(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제사)와 약속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족속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음을 강조,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과 약속이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에 성취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혈통적인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
7 또한 아브라함의 씨(사라 태생 이삭과 하갈 태생 이스마엘)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창 21:12
8 곧 육신의 자녀(이스마엘)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이삭)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이스마엘과 이삭은 다 아브라함의 씨였지만 여기서 말한 '자녀'는 이스마엘을 제외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이 육신적인 혈연에 의존하지 않음)(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약속'에 의한 것)(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예정을 가지고 계시며 그 선택자들에게 약속의 능력으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약속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특별한 배려로 이삭이 태어났다.) 하시니라 창 18:10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이삭의 아내)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똑같은 환경과 신분 속에서도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유기된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다시 한번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 (이삭과 이스마엘은 그의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 그 뿐만 아니라 같은 날 잉태되어 같은 날 태어나게 된 동일한 환경과 신분을 소유한 자들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의 약속이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리브가에게도 주어졌으며(J. Calvin) 그의 약속은 육신적 후손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후손에 의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선택으로 성취됨을 보여준다.)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에 근거할 뿐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어떤 자들은 간과하며 또 어떤 자들은 선택하는 것이다)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창 25:23 (이 예언은 장자권 양도와 에돔 족속의 속박 등과 같은 역사적 성취뿐만 아니라 메시야 왕국이 궁극적으로 불의로부터 승리할 것을 계시하고 있다.)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말 1:2 이하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출 33:19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출 9:16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약속과 선택에 따라, 곧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자비를 행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려는 것이다.
?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바울은 말 1:2, 3을 인용하여 개인들에게 예언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성취되어졌는가를 증명한다. 한편 여기서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을 감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셈어적인 개념을 가진 '미워하였다'(*, 에미세사)라는 말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S. Jeremias). 따라서 여기서 사용된 '미움'이란 말은 단지 에서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대상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Harrison). 하나님은 에서와 그의 후손들을 자신의 특별 은총으로부터 제외시킴으로써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하도록 작정하신 것이다(말 1:4). 바울은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하나님의 사랑과 미워하심을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또 다른 많은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명분과 기득권을 가진 유대 민족일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섭리로 버려질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성 경: [롬9:14]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하나님은 에서를 유기하시고 야곱을 선택하실 때에 그들이 다 자랄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의 다 자람을 지켜보시고 또한 그들의 업적과 공로를 다 살피신 후에 선택과 유기를 하셨다면 진정한 선택과 유기의 의미는 상실되고 말 것이다(Harrison). 실로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의 선택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목적에 기인하는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에서에 대한 불공평한 대우와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면 야곱 조차도 결코 선택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야곱에게 있어서 축복은, 행위와 업적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약속의 씨로 선택되었다는 것에 더 큰 사랑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선택의 축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 본절에서 '불의'(*, 아디키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것인지 또는 그의 행위를 지시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의 속성이나 행위에 있어서 '불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헬라어 '아디키아'는 어떤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서 법적인 불의를 뜻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보다 근본적인 근거에서 창조주의 의의 개념을 제시한다(20절). 다시 말해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거나 유기하는 것은 양자 모두에게 불평등한 것이나 잘못된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성 경: [롬9:15]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 바울은 또 다른 역사적 사건 곧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선택하시고 애굽을 유기하신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번 선택의 절대 주권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에 대한 이해는, 바울이 인용한 출 33:19 당시 상황을 이해한 후에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은혜를 체험하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악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 점이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애굽을 용서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백성을 용서하셨는가에 대하여 그 근거를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한다(출 33:16, 18).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나의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였다. 즉,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그 어떠한 외부적인 환경과 조건에도 구애됨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라는 '작정' 외에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J. Calvin). 그러므로 출 33:19의 내용을 인용하여 인간에게 내려지는 구원의 은총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자비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의 축복(구원)을 누릴 수가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는 결코 값주고 살 수 없는 절대적인 은혜인 것이다.
성 경: [롬9:16]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 원하는 자로...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 '원하는 자'(*, 델론토스)와 '달음박질하는 자'(*, 트레콘토스)는 앞에서 언급된 에서와 야곱뿐만 아니라 모세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트레코'(*, '달리다', '경주하다')라는 단어를 긍적적인 의미로서 고대 운동 경기의 승리자를 묘사할 때나(고전 9:24)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자신의 삶을 묘사할 때에 사용하였다(갈 2:2;빌 2:16). 그러나 본절에서는 보다 사실적인 의미로서 모세의 소원과 민족을 위한 노력들마저도 아무런 칭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였다(Meyer). 아브라함과 모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경주로 구원을 이룰 자는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달음박질조차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 경: [롬9:17]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 여기서 다시 논리의 전개는 유기(遺棄)의 표본으로 세워진 바로에게로 넘어간다. 바울은 '성경'(*, 헤 그라페)을 의인화시킴으로 당시 바로에게 직접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적 의지를 보다 생생하게 상기시키고 있다(Bruce, Harrison).
? 내가...너를 세웠으니 - '세웠으니'에 해당하는 '여세게이라'(*)가 70인경에서는 '디아테레오'(*, '지키다', '보존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인 '디에테레데스'(*)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능동태 1인칭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예정 의지를 보다 선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특히 70인경과는 달리 '여세게이로'(*, '내가 일으키다')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변형시킨 것은 단순히 70인경을 번역하지 않고 보다 원문에 가까운 뜻을 찾기 위함인 것 같다(Bruce).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의 바로를 단순히 존재케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남겨두셨다(Hendriksen. Harrison. Ridderbos). 역사상에 나타난 바로는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점점 더 궁지로 몰아가는 악행을 범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 구원을 더 영광된 것으로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J. Calvin). 하나님은 그를 믿고 섬기는 자들뿐 아니라 그를 대적하는 자들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영광을 위하여 죄를 조성하였다고 판단 할수는 없다(6:1, 2 주석 참조). 본절의 핵심은 죄를 조성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인간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 내 능력을 보이고...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다 - 하나님이 바로를 세우신 것은 하반절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이 바로를 왕으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명을 보존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창조주의 권위를 만방에 알리시기 위함이다. '능력'(*, 뒤나민)과 '이름'(*, 오노마)은 서로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눈에 드러나는 이적적(異蹟的)인 기사들은 하나님의 속성 곧 그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Kasemann). 실제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사건은 그 이후에 다른 모든 민족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수 2:10, 11;9:9;삼상 4:8).
성 경: [롬9:18]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 -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강퍅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긍휼을 입었다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행위는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원하는 자'(*, 델론토스)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16절) '그의 원하는'(*, 델레이) 바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긍휼은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로서(마 20:15) 그의 판단은 인간의 거짓된 생각들과는 달리 항상 참되시며 공의로우시다(3:4). 따라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면서 바로와 관련된 삽화를 종결시키고 있다.
? 강퍅케 하시느니라 - '그가 강퍅케 하셨다'(*, 스클레뤼네이)라는 표현은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 디아테레오)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강퍅케 하도록 결정하셨다는 문자적 의미보다 그의 죄악과 본성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이것은 본서의 1장에 서술된 원리와 긴밀히 관계되어 있다(1:24, 26, 28, 32). 그는 스스로 마음이 완악해지고 또한 스스로 더 큰 죄악을 범함으로 인하여(출 7:14;8:19) 돌이킬 수 없는 심판에 이르게 되었으며 또한 그는 완고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17절). 하나님은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지도 아니하셨으며 또한 고의적으로 그의 죄악을 조성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더 큰 죄와 완악함을 만들어 낸 것이다(A. Barnes).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3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4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5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7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다만 5)"이삭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너의 자손이라고 부르겠다" 하셨습니다. 창 21:12
8 이것은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참 자손으로 여겨지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9 그 약속의 말씀은 6)"내년에 내가 다시 올 때쯤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한 것입니다. 창 18:10; 14
10 그뿐만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수태하였는데,
11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이라는 원리를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이 살아 있게 하시려고,
12 또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7)"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셨습니다. 창 25:23
13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8)"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말 1:2; 3
14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9)"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출 33:19
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17 그래서 성경에 바로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10)"내가 이 일을 하려고 너를 세웠다.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출 9:16(칠십인역)
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1028 제목 : 오직 믿음 성경 : 로마서 14장 17 - 23절 (0) | 2018.12.07 |
---|---|
20071021 제목 :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복음 성경 : 요한복음 14장 15-31절 (0) | 2018.12.07 |
20071007 제목 : 연보와 넉넉함 성경 : 고린도후서 9장 1-15절 (0) | 2018.12.07 |
20070930 제목 : 스게와의 일곱 아들 성경 : 사도행전 19장 11-20절 (0) | 2018.12.07 |
20070923 제목 : 마가와 바나바, 베드로, 바울 성경 : 사도행전 20-25절 (0) | 2018.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