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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6 하나님의 뜻-신비 성경 : 고린도전서 3장 21-23절 주제 : 하나님의 뜻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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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6 하나님의 뜻-신비 성경 : 고린도전서 3장 21-23절 주제 : 하나님의 뜻

필명 이일기 2018. 12. 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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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6

하나님의 뜻-신비

성경 : 고린도전서 321-23

주제 : 하나님의 뜻

 

1. 지난주 말씀

모든 사람 각자에겐 하나님의 뜻인 소명이 있다고 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데 시급성에서가 아닌 중요성에서 현재의 삶에 우선 순위를 두고 충실하자고 했다.

오늘은 신비 속의, 숨겨진, 현재의 삶인, 하나님의 뜻을 소망 속에서 충실하자는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2. 역설의 신비

등산과 여행의 법칙 - 목표와 목적(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분명하면 그 길을 향하는 과정은 당연히 그 목표를 따르는 삶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어떤 길이라도 갈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길이 하나님의 뜻인지에 대하여 망설일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가는 그 길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상황마다 일일이 우리가 할 바를 말해주지 않는다. 지침과 원리는 주지만 장황한 행동목록을 제시하지 않는다. 전체적인 방향만 제시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와 동행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수많은 실제적인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숨은 뜻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사실은 확실히 믿을 수 있지만 그 방법은 우리가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분의 주권을 믿으며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하나님의 드러내신 뜻은 하나님의 갈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순종할 수도 거역할 수도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따르기로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간청하시고 권하시고 재촉하시며 감화를 끼치시고 부추기신다. 그러나 거역하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 내키는 대로 살도록 놓아두신다.

 

구체적 삶은 결정론적인가 자유의지론적인가?

신비다. 역설이다. 인간이 알 수 없다. 그래서 목표가 분명하면 우리의 삶은 약속과 소망 속에서 현재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살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이다.

결정론은 인간은 프로그램으로 입력된 로봇처럼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로봇트가 된다. 자유의지론은 궁극적으로 벌어질 일들은 인간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무력한 분이 된다. 두 견해 모두 문제가 있다.

모순과 역설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두 견해에 대한 모순은 서로 상반되지만 역설은 결국 하나임을 드러낸다.

시간과 질량에 대하여 뉴톤은 인간 경험의 차원에서는 절대적이지만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다른 차원에서 상대적인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아이가 자그마한 돌로 장난으로 친구에게 던졌다 하자! 같은 돌이라도 살며시 던질 때와 세게 던질 때 차이가 있는 데, 맞는 입장에서 보면 천천히 던져서 맞을 때는 안 아프지만, 그래서 장난으로 이해 하지만, 세게 던져 맞은 때는 그 충격으로 문제가 생긴다. 맞는 입장에서는 같은 돌이라도 강도가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듯 상대적이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역설적인 것이다.

 

역설을 이해해 보자.

소설가와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 관계를 생각하면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역설 속에서 사는 것이다. 성육신이 그 예이다.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신비가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세계에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왜 이와 같은 모순(역설)을 행하셨는가? 좋은 결말을 보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고난을 행하신 것이다. 고난을 통하여 그의 뜻을 이루신 것이다.

 

성경 이야기 속에 記者는 전체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한편,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드러낸다. 등장인물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제한된 정보만 가지고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행해야 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고 그 믿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숨은 뜻을 현재의 삶에서 책임감 있게 충실히 사는 것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을 모른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숨겨진 뜻 사이의 긴장은 하나님의 구원의 뜻에서 궁극적인 해결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숨은 뜻은 이야기가 완성되는 날 승리와 축복을 약속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야기의 끝을 영광스럽게 끝내실 것이다.

 

3. 고난의 신비

고난도 상황 속에서 (숨겨진)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상황 속에서는 어렵지만 궁극적으로 결국 모든 것을 잘되게 하실 것이다.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한 고난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억울한 고난은 다르다. 그런데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그의 궁극적인 뜻인 구원을 이루시기도 하신다.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언젠가는 그 고통을 끝내 주실 것이다. 그 때까지는 고난이 있는 것이다. 고난은 날벼락 일 수 있다. 역설의 전형은 십자가다. 모든 것이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고난 속에서도 선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구속을 이루신다는 기독교의 핵심 내용은 최종 단어는 아니다. 최종 단어는 하나님께 있다. 그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데 있다. 고난은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믿음을 갖는다고 고난이 경감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성경이 그것을 말한다.

 

4. 결론

하나님은 우리의 개성을 존중한다. 우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억지로가 아니다. 다만 믿음으로 살기를 바라신다. 증거는 없지만 믿음으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믿음이란 우리의 바람대로 풀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믿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구속 사역의 징후를 보도록 하신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믿음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은 헛된 것이다.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이란 본래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고역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그 상황을 견뎌낼 의지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믿음이란 당면한 상황을 넘어 과거와 미래를 보도록 한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결국 현재 우리의 상황 속에서는 어렵지만 모든 것을 잘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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