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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3 제목 : 숲속의 나무 성경 : 고린도전서 13장 9-13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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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3 제목 : 숲속의 나무 성경 : 고린도전서 13장 9-13절

필명 이일기 2018. 12. 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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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3

제목 : 숲속의 나무

성경 : 고린도전서 139-13

0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 KBS 토요일 오후 8시 한국사회를 말한다에서 선교 120주년, 한국교회는 위기인가라는 제목의 방송을 했다. 한국사회의 문제 중의 하나인 개신교 문제를 다룬 것이다. 그런데 일부 몇 개 문제있는 대형교회들(금란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외 2)2개의 모범적인 교회를 보여주었다. 대형교회의 문제점과 성장제일주의, 비민주적인 교회운영과 목회자 세습제 등의 목사의 독선 등에 비판적이었다. 소목사도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부분적인 시각이다. 개신교의 95%가 긍정적이고 5%가 부정적이라면 그러한 입장에서 조금 더한 입장을 취해야 공감을 한다. 그런데 KBS5%55%의 시각에서 방송을 하였다. 문제가 있다. 95%의 긍정적인 교회들 중에는 구제와 사회 참여적 시각의 그런 입장보다 종교의 본질인 위로와 인간 구원, 특히 영적인 구원의 문제에 더 관심하고 있다. 이들의 입장은 전혀 반영이 안되었다. 물론 그러한 입장은 교회 관계 기관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공영방송인 KBS가 이 문제를 즉 사회적 구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은 불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소목사는 결코 순복음교회나 금란교회 등의 그러한 문제들을 비판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문제도 그들 교회 교우들의 입장에서는 즉, 영적 구원의 문제를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하는 분들에게는 불만이었을 것이다. 부분적인 시각이 낳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일이라고 해서 많은 믿는 사람들이 불만을 가져 시위를 했던 것이다. KBS의 시각은 바른 지적이나 부분적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 부정(긍정), 부분(다른 부분), 한계(한계 밖), 아는 것(모르는 것), 나무() 등만을 보면 그 외의 것들을 보지 못해서 그로 인한 유익을 얻지 못한다.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이상이 현 세상에서도, 그리고 미래에 드러나게 된다.

 

3. 성경본문 말씀

0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 현재만 생각한다. 그러나 미래의 내세가 있다.

이 세상에서의 하늘 나라에 관한 지식은 부분적(部分的)인 것이다. 어린 아이의 지식인 것이다. 자기 중심(自己中心)이며 주관적(主觀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하나님에게 대하여는 무관심(無關心)한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어린 아이들의 놀음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너무도 주관적이고 감각적(感覺的)이다. 과학적 지식(科學的知識)이란 것은, 감각주의에 속하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과 역사를 모두 상대적 가치(相對的價値)의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역사적 원리로만 표준삼아 모든 것의 시비(是非)를 논하고, 역사를 초월한 이적은 부인한다. 이 세상 사람의 과학이, 다른 것은 다 행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인간의 심령을 통솔하지는 못한다. 통솔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나님 말씀을 가장 낮추며 업신여긴다. 이것이 유치한 지혜이다. 현재만 느낄 줄 아나 미래(未來)를 예비할 줄은 모른다. 현재의 고통을 느껴 울뿐이고 장래의 고통을 면할 줄은 모른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

2) 현재만 알기에 건망증이 심하나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여 미래의 소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밤에 하늘을 보면 별들이 많이 보이는데 어떤 별들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내세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내세를 깨닫고도 또 다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1:23,24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는데 건망증(健忘症)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더러운 연못과 같다. 더러운 연못에는 고기는 다 죽어 버리고 개구리만 성한다. 셀바리우스, 무엇을 먹다가도 머리를 뒤로 돌이키면 자기 앞에 놓은 식물(食物)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식물을 찾기 위하여 달아난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건망증이 있는 원인은 하나님 말씀과 반대되는 죄악과 이 세상 생명을 좋아하는 애욕(愛慾)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힘써야 된다. 그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야 될 것이다(벧전 2:2). 그 이유는, 그는 희미하지만 참된 내세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요일 3:2,3, 고후 3:18

3) 부분을 통하여 전체를 알아야 한다.

현세에 우리가 아는 바를 바울이 무가치하고 무용하다고 말함이 아니다. 부분은 전체를 증거하는 법이다.

예화를 하나 들면, 이태리사람 콜룸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역사가 타당할 것 같다. 그가 149283일 아침 여덟시에 88명을 실은 세배(Sante Maria,Pinta, Nina)를 가지고 대서양(大西洋)을 건너가던 중 817일엔 선원들이 콜롬부스를 원망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을 안정시켜 항해를 계속하던 중, 107일에 철물(鐵物)에 붙였던 작대기 한 개와 판자조각 한 개와 또 나뭇가지를 물에서 건졌다. 그것이 그들에게 큰 소망을 주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육지가 가까운 줄 알아 힘을 얻고 기뻐하였다. 과연 그 날 밤 11시에 콜롬부스는 멀리 있는 불빛을 보았고, 12일 오전 2시에 그들은 신대륙(新大陸)을 발견하였다. 그 때에는 전에 콜럼버스의 발 밑에 엎드리어 자복하며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들은 다 흙에 입맞추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들의 여행에 있어서 부분적인 지식, 곧 나무 조각 같은 것을 보고서 전체(大陸)의 존재를 확신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내세에 대한 현재 우리의 지식이 희미하다고 하여, 내세에 대한 확신을 못 가질 수는 없다.

4) 믿음 소망 사랑을 항상 소유해야 한다.

신망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신자에게 늘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소망을 가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어서 장래의 은덕(恩德)을 보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사람을 의뢰하여 믿으면 자유(自由)도 잃고 진정한 소망(所望)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는 믿음은, 무엇을 의지하고야 살 수 있는 인생의 최고 신앙이며, 또한 진정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되어지는 믿음이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못 가지는 믿음이란 것은, 생명 없는 사물(事物)의 사정(事情)이나 이치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이나 이치는 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지 못한다. 1+2=3의 셈법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이다(11:6).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 믿고 그의 상주시는 사실은 못 믿는 것은,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믿음 정도이다(2:19).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收穫)을 가져오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에, 믿음 있는 병자는 곧 고침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앙이다. 왜 구원은 믿어야 받도록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구원은 인생이 알기 어려운 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는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성경은 법칙 상대(法則相對)의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4.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불편부당 하였는가? 부분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불신이었다.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지 못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자. 그러면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을 갖고 살자. 믿음 소망 이 모든 것은 사랑이 있어야 온전해 진다. 사랑하며 살자. 그러면 온전한 날이 오면 모든 과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소망을 갖고 살자. 좌절과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길은 바로 소망(희망)을 갖는 것이다. 희망은 분명히 존재한다. 기회는 있는 것이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인내하며 살아야 한다. 세월이 약일 수도 있다. 낚시질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이들 잘 돌보자. 열심히 살자. 현재에 투정하고 불만 갖고 괴로움 속에서 살아봐야 내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현재 있는 것에 열심을 내라. 격려하고 위로하며(사랑하며) 살자.

 

5. 내가 그간 어떻게 하나님을 불신했는지 점검하여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소망을 갖으며, 기도하며, 하나님 사업에 열심을 내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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