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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5 제목 : 생명과 영생 거리 - 신 없는 인간의 비참 성경 : 잠언 30장 1-6절 본문
20060625
제목 : 생명과 영생 거리 - 신 없는 인간의 비참
성경 : 잠언 30장 1-6절
1.월드컵 축구
온 나라가 월드컵 축구로 들썩거렸던 지난 몇 주간이었다. 방송들은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국 방송이란 선정적인 것을 쫓고,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광고 수입등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엄청난 거리였다. 사람들이 재미를 즐길 수 있는 엄청난 이벤트였다.
살아있는 인간은, 인간의 욕망은 소일거리를 찾는다. 즐길 거리를 찾는다. 재미있는 것을 추구한다. 쾌락을 추구한다. 기분전환을 위한 거리를 찾는다. 일거리를 찾는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인간은 공허함을 느끼고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생명거리를 몰두한다. 생명 유지 보전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거리에 몰두하면서 생명과 반대가 되는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2. 신 없는 인간의 비참 - 인간은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신이 한 손가락만 일을 한 후에는 신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람들을 파스칼은 무신론자라고 말했다. 우주가 자체적으로 돌아간다는 무신론자들의 입장을 파스칼은 같은 철학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통렬히 비판했다. 우주는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관리자가 있다는 말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생명이 있다. 생명을 위해서는 그 동력이 있어야 한다. 그 동력은 자체적으로 조달이 불가능하다. 외부로부터 조달되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공허하게 되고 죽음밖에 없는 것이다. 우주도 마찬가지이다.
신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인간이란 공허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체적인 원리와 이치에 의하여 돌아가다가 소멸하는 인간 존재라는 것은 결국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일거리를 찾아야만 공허함을 벗어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왕은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행복한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본문과 인간의 무지와 영생의 소망
1)이것은 야게의 아들 아굴이 말한 잠언이다. 2)이 사람이 이디엘에게 말하고, 또 이디엘과 우갈에게 말하였다. 또는 '이것은 마싸 사람 야게의 아들 아론이 한 말이다'. 마싸를 '잠언', '경고'로 이해하지 않고 지명으로 이해한 것임 또는 "그가 말하였다. '하나님, 저는 피곤합니다. 하나님, 저는 피곤합니다. 제가 어떻게 다시 힘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히브리어 자음 본문을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번역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
2 참으로 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둔한 짐승이며, 나에게는 사람의 총명이 없다.
3 나는 지혜를 배우지도 못하였고,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아는 지식도 깨우치지 못하였다.
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사람이 누구며, 바람을 자기 손에 움켜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물을 그 옷자락으로 싸고 있는 사람이 누구며 땅의 모든 경계선을 그은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은 무엇인지, 정말 네가 아느냐?
5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순결하며, 그분은 그를 의지하는 사람의 방패가 되신다.
6 그 말씀에 아무것도 더하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너를 책망하시고, 너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30:3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 저자는 지혜자였다(1절 주석 참조).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검토해 본 결과 참 지혜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종교 개혁가인 칼빈(Calvin)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기독교 강요, 1권 1장)고 말했다.
=====30:4
'너는 아느냐'는 알지 못한다는 답을 염두에 둔 일종의 수사학적 표현인데 저자는 이 같은 표현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감히 비교될 수도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 절과 유사하지만 그 내용이 더 상세한 욥 38-41장의 경우 화자는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본 절에서 하나님이 화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본절은 2,3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인간의 지식의 한께 및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저자 스스로 던진 질문의 내용으로 보면 될 것이다. 저자는 가시적 피조 세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색을 통해 인간은 먼지처럼 낮아져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30: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純全)하며 - '순전하며'에 해당하는 '체루파'(* )의 문자적인 뜻은 '정화되었으며'이다. 이 표현은 그 이미지를 불순물이 제거된 금속에서 따온 것이다. 정화된 금속은 순결하다는 이미지와 함께 귀한 것이라는 이미지도 내포한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후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계시해 주는 살아 있는 말씀의 고귀함에 대한 인식이다.
=====30:6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 정결한 금속에 더러운 찌끼를 다시 섞어서는 안 되듯이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인간의 상상력이나 전승(傳承) 따위를 섞어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다. 보이지 않는 실체 및 진리에 대한 사색에 있어서 곡해(曲解)의 위험성은 항상 상존해 있다 :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특히 지식의 교만에 빠진 자의 경우 자신의 이성적 판단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이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교만을 드러낸 것이며 인간의 이성이 지극히 유한하며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소치이다.
인간의 감각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이 아는 것만 인정한다. 인간이 무지한 원인이다. 인간은 무한소와 무한대의 중간에 존재한다. 어느 때는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어느 때는 우리 자신이 우주임이 보이는 인간이다. 이는 비밀이다. 인간은 궁극이 될 수 없다. 인간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우쳐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과 끝이 있는 존재이나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지평선을 보면서 깨우쳐야 한다. 보이는 데까지만 있는 것 같아도 그 너머에 가면 또 세상이 존재한다. 보이는 생명 이상의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비참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영생의 소망은 믿음 안에 있다.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자 섭리자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3.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여 참 행복을 영유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한다.
세상은 기분전환을 위한 거리 곧 생명 거리가 있는 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영생 거리가 있음을 인식하고 세상에서 만족하지만 말고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믿음으로 살기 바란다. 순간적인 삶을 살면서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기를 다시 한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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