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블로그
20090322주일낮예배 제목 : 나를 따르라 성경 : 누가복음 5장 1-11절 순종이라는 키포인트 본문
20090322주일낮예배
제목 : 나를 따르라
성경 : 누가복음 5장 1-11절
순종이라는 키포인트
오늘 말씀은 본문 말씀으로만 말씀을 나눈다. 본문 말씀은 다른 성경에 나오는 말씀ㅂ다 더 상세하고 의미가 잇다. 마가, 마태복음에는 단순히 제자들을 부른 사건만 나열한 반면 제자들 그것도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인생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가 바로 예수 때문이고 그에게 순종한 것 때문이었다는 저자의 의도가 담긴 기록이다.
마가복음 1장 16-20절
제자 넷을 부르시다(마 4:18-22; 눅 5:1-11)
16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19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복음 4장 18-22절
어부들을 부르시다(막 1:16-20; 눅 5:1-11)
18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20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21 거기에서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6)동생 요한을 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 그, '형제'
22 그들은 곧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다(마 4:18-22; 막 1:16-20)
1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갈릴리 바닷가, 디베랴 바다)에 서 계셨다. 그 때에 무리가 예수께 밀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2 예수께서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고기를 잡지 못한 빈 배였다. 수확이 없이 허탕 친 어부들을 묘사하고 있다.
3 예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수많은 무리로 인하여 효과적인 가르침을 위하여 배에 올라타 마치 강단에서 설교 하듯이 청중들은 바닷가에 둘러 앉자있고 예수님은 배에 올라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다.
4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헛수고만 한 전문 어부 시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시몬은 바닷가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였다. 반면 예수는 목수로서 생활해 오시던 분으로서 한 번도 그물을 던져보지 못한 분이었다. 그런데 목수 출신의 예수께서 무슨 연유에서인가 고기잡이 전문가인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다.
5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예수님께, 예수님 말씀에, 예수님이 하신 고기 잡는 방법에 순종하였다. 예수님은 사실 세상 직업으로 말하면 목수였다. 목수가 어부에게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해본 어부라면 누구나가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불합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1) 예수는 고기잡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는 목수였다. (2) 고기 잡는데 최적의 시간은 밤인데 지금은 태양이 바다에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이었다. (3) 그물을 내리는 데는 적당한 깊이가 좋은데 예수는 깊은 데로 나가라고 명하신다. (4) 시몬은 고기를 잡기 위해 지난밤을 새운 까닭에 몹시도 지쳐 있었고 게다가 깨끗하게 씻어 놓은 그물을 다시 내려 간밤의 헛수고를 다시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불합리한 점을 모두 알고 있는 시몬은 전문 어부답게 예수의 가당찮은 명령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반박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말씀을 의지하여 그 명령에 순종한다.
시몬의 어부로서의 경험과 지식과 경력은 예수 앞에서 바람 속의 먼지와도 같은 정말 하찮은 것이었다. 그런 경험과 지식 등이 한 끼니의 양식을 해결해 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죄와 구원의 문제는 결코 해결 해주지 못한다. 사실 복잡한 삶의 정황들을 몸으로 부딪쳐가며 체득한 경험들이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노하우(konw-how)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경험들과 스스로 설정한 원리나 기준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케 되는 경우가 있다.
성도들의 삶이란 단순한 자연 법칙이나 합리적 상식의 선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역설적이고 이적적인 차원 또한 강력히 요청된다. 특히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는 끝없이 자기를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탁하고 순종하는 신앙 훈련을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실패, 그것은 곧 하나님의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6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그들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들 자신이 전문가 임에도 오히려 아마추어 예수님께 순종하여 좋은 결실을 얻은 것이다. 자기 주장이나 자기 고집과 상대방을 무시하고 업신여기지 않고 순종한 결과 남의 말을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다.
순종(obediance)은 항상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신다(삼상 15:22). 불합리하고 부적합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렇다. 우리에게 그 상황이 불합리하고 불가능해 보이고 나타난 결과가 기적처럼 느껴질지라도 예수에게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예수께서는 고기의 있고 없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시몬의 심증을 보신 것이다. 결국 기적은 예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일 사람의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곳에 차고 넘치게 주어진다. 한 사람의 순종이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이익을 미치며 은혜를 끼치게 된다.
여러분은 순종으로 은혜를 누리고 있는가?
7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고기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 배가 잠길 지경에 이르렀다는 묘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인색하지 않고 풍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6:38;빌 4:19). 이러한 일련의 장면은 시몬이 사람 낚는 어부로서 부름을 받은 후에 감당할 사역들을 미리 예시(豫示)해 준다. 후에 그는 예수 부활 승천 후 말씀을 증거하고 한번에 3,000명 또는 5,000명의 회개하는 신자들을 얻게 되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한다(행 2:41;4:4).
8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왜 베드로는 예수님께 엎드려 자신을 떠나달라고 하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했을까? 9절에 의하면 놀라서 그랬다고 한다.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그 능력 앞에 초라한 자신의 무능력이 드러났던 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시몬'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이 되다가 이 구절에 와서야 '베드로'라는 이름이 나온다. 시몬과 베드로라는 이름이 함께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우는 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만 나타난다. 여기서 누가가 의도적으로 베드로라는 이름을 시몬이라는 이름에 덧붙여 기록한 것은 중대한 상황의 변화를 예시하는 것이다. 즉 베드로가 삶에 중대한 전환기(轉換器)를 맞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라 하는 이름은 그가 예수를 만난 후에 예수께서 그에게 지어주신 것이다(마 16:18;요 1:42). -베드로의 신앙체험, 성령체험
다른 사람의 무릎 아래 엎드리거나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으로 겸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수치로 여겨지기도 하고 비굴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여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무릎 아래 엎드리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자존심의 마지막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종종 삶의 내용이나 삶의 질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서 그것은 포로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됨이나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무릎아래 엎드리는 것은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 그리고 모든 삶을 상대방 앞에서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본래 자아와 본래의 삶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회귀(回歸)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삶을 찾는 것이고 본래의 우리의 형상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내용이나 자아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본래의 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다. 현재 우리의 삶의 질그릇에 담긴 것을 쏟아 내고 하늘로부터의 것을 담아야만 한다. 대단한 역설(paradox)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포기하면서 얻어지는 것이다.
베드로는 5절에서 '선생이여'라고 부르던 호칭을 바꾸어 이제는 '주여'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호칭은 베드로의 예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말이다. 70인역에서 '퀴리오스'('주')는 하나님과 동의어로서 빈번히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단순한 선생이란 표현보다 훨씬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베드로가 이 순간에 예수를 신적 존재로 감지했는지 알 수 없으나 '주'로서의 권능과 권위를 수반한 예수의 탁월성을 감지했음이 분명하다.
'죄인'이라는 용어는 누가에게 있어서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들 중 하나이다. 누가에 의해서 경멸적이 아니라 동정적으로 사용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공공연한 죄와 용납하기 어려운 직업 및 생활 방식 또는 이교도라는 신분 때문에 유대의 종교 집단에서 추방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누가는 이런 죄인들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의 탁월하신 신적 권능을 목격하고서 상대적으로 나약하고 비천한 자신의 죄성마저 돌아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1)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이적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연의 정체를 깨달아야 마땅하며(사 6:5) (2) 그 같은 상황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9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놀라움을 나타내는 헬라어 '담보스'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하며 신의 임재에 대한 외경심을 내포한 말이다. 납득할 만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자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궁극적으로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으로써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10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 야고보와 요한도 베드로와 같은 체험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무서워 말라'며 시몬의 죄인 됨을 용서하신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은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말한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10절에서 이미 이야기되었듯이 하나의 일에 있어서 공동 협력을 행하는 '코이노노스'의 삶의 태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의 삶은 예수 공동체의 삶이다. 이들의 결단과 헌신은 예수 공동체를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과 결단이 무분별한 희생이나 복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물론 복음 사역자로서의 특별한 헌신을 뜻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용해 볼 때 모든 사회적 책임까지도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갖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의 가장 첫자리에 놓자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깨달아야 할 교훈의 말씀은 바로 누가의 관점이다. 누가는 제자들의 변화를 기록하였다.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순종한 것으로 인하여 변화된 그들을 통하여 당시의 누가 공동체에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고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의미로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말씀하시는 것으로 믿는다.
사무엘상 15장 22절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라고 했고,
누가복음 9장 23절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는 말씀을 새기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인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0405주일예배 제목 : 예수님과 십자가 성경 : 요한복음 19 장 1-16절 주제 : 역설의 삶을 살자.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낮추신 예 (0) | 2018.12.09 |
---|---|
20090329주일예배 제목 : 의의 생명 성경 : 로마서 5장 12-21절 (0) | 2018.12.09 |
20090315주일낮예배 제목 : 하나님 알고 전하기 성경 : 요한복음 17장 20-26절 (0) | 2018.12.09 |
20090308주일낮예배 제목 : 하나님의 통치원리 성경 : 창세기 2장 15-17절 (0) | 2018.12.09 |
20090301주일낮예배 제목 : 소신 있는 하인 성경 : 사도행전 17장 28-34절 (0) | 2018.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