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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6주일낮예배 제목 : 사랑관계 성경 : 창세기 2장 18-25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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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6주일낮예배 제목 : 사랑관계 성경 : 창세기 2장 18-25절

필명 이일기 2018. 12. 10.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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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6주일낮예배

제목 : 사랑관계

성경 : 창세기 218-25

 

1. 사랑하는 관계

2000년 민주개혁국민연합 전북본부가 결성되고 그 일을 위하여 제가 사무처장을 할 때, 휘하의 권영석이라는 사무국장이었다. 전북대학교 법대를 다닐 때는 학생운동을 했었다. 전국에 이 단체가 설립되면서 전북본부도 사무실을 내고 준비하던 때, 그 친구가 설립 준비룰 위해 먼저 일을 시작하였고, 얼마 안 되어 제가 들어가 사무처장으로 총괄하게 된 것이었다. 그 친구가 부분 준비를 하고 제가 주도하여 설립시키고 본격 활동을 한 것이다. 그러다 이 친구가 그만 두게 되었는데, 그 이임 인사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애지중지 준비한 사무실 비품 등등 자신의 손때가 묻은 것들을 생각하고, 지난 기간 동안 열심히 일했던 기억을 하며 못내 아쉽고 섭섭하다라고 했다. 정말 공감했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근무하며 애정을 쏟던 추억을 뒤로하고 그만두니 얼마나 애석했겠는가. 그 후 지난 주 교회명 등기 변경하려고 하고 있는 데 뒤에서 목사님 하고 부르는 데 뒤돌아 보니 그 친구였다. 8,9년 만에 만났는 데 어제 본 사람처럼 반가웠다.

 

사물이나 일에 있어서 조차 이러한 인간인데 사람에 대한 감정은 어떻겠는가. 지극할 수밖에 없다.

 

쌩떽쥐페리의 어린왕자

비행기 사고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 나'는 그곳에서 어린 왕자를 만난다. 아주 작은 떠돌이별에서 자존심 강한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살던 어린 왕자는 장미꽃의 투정에 마음이 상해 그 별을 떠난다. 여행 중에 어린 왕자는 여러 별을 거친다. 이 별들은 모두 어린 왕자 자신의 별처럼 아주 작은 떠돌이별이어서 한 사람씩만 산다. 그곳들에서 어린 왕자가 만난 사람은 왕과 허영심 가득한 남자, 주정뱅이, 상인, 가로등 관리하는 사람, 지리학자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 왕자는 지구로 오게 되었다.

지구에서 어린 왕자가 처음 만난 것은 뱀이었다. 뱀은 어린 왕자에게, 언제고 떠나온 별이 그리우면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린 왕자는 여우를 만난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길 들인다'는 것의 의미와 책임, '잘 보려면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정원을 가득 메운 장미꽃들보다 자신과 관계를 맺은 장미꽃 한 송이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자존심 강하지만 한없이 약한 장미꽃이 새삼스레 걱정스러워진다.

지구에 온 지 꼭 1년이 되는 날, 어린 왕자는 강한 독을 지닌 뱀에게 물려 쓰러진다. 서로를 길들이며 관계를 맺었던 그 약하고 순진한 장미꽃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별로 떠난 거다.

'비행기 조종사'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마다 어린 왕자의 장미꽃, 그리고 어린 왕자에게 그려 준 양을 생각하며 행복감에, 또는 슬픔에 잠긴다.

 

어린 왕자에게는 수많은 장미꽃들보다 자신과 관계를 맺은 자존심 강하나 약한 장미꽃 한 송이가 더 소중하다. 자신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막에 사고로 불시착항 비행기 조종사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 볼 때마다 어린 왕자의 장미꽃과 어린 왕자에게 그려준 양을 생각하며 행복감과 슬픔에 잠긴다. 사랑하게 된 관계 때문이다.

 

황순원의 소나기

소년은 서울에서 온 윤 초시의 손녀딸을 징검다리 한가운데서 만나게 된다. 몇 일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물장난 이었다. 소년은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소녀가 물장난을 하다 조약돌 집어 '이 바보'하며 소년 쪽으로 던지고 달려간다. 소년은 그 조약돌을 간직하면서 소녀에게 관심을 갖고 소녀를 그리워한다. 개울가에서 다시 만난 소년과 소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때 소나기가 내렸다. 소년은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는 소녀를 위해 수숫단을 날라 자리를 만들어 준다. 좁은 수숫단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위해 주려는 마음이 생기고 서먹했던 거리감도 해소된다. 돌아오는 길에 도랑의 물이 엄청나게 불어있어 소년이 등을 돌려 대자 소녀는 순순히 업히어 건넌다. 그러다가 개울가에서 소년과 소녀는 다시 만난다. 그 소나기에 감기를 앓았다는 소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보면서 '그날 도랑 건널 때 내가 업힌 일 있지? 그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다'하는 말에 소년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날 헤어지면서 소년은 이사 가게 되었다고 말하는 소녀의 눈동자에서 쓸쓸한 빛을 보았다. 그런데 이사를 간다던 소녀는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는 것을 아버지를 통해 알았다.

 

사람은 자신과 추억이 있던, 마음에 두고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워한다. 사랑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말씀 나눌 때 읽었던 김춘수의 시을 다시 읽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 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빛이 되고 싶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 사랑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사랑하며 사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며 사는 존재다.

 

2. 본문, 이름붙임의 의미

18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19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20 그 사람이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 남자를 돕는 사람 곧 그의 짝이 없었다.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단순한 작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말한다.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애지중지 한다는 것이다. 돌보고 가꾸고 키우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1 그래서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는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뽑아 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23 그 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이쉬)에게서 나왔으니 여자(잇샤)라고 부를 것이다.''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한 몸을 이루는 것이란 지체는 다르지만 하나라는 말이다. 나의 몸에서 만들어진 내 몸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자신과 관계가 있는 자신과 같은 존재, 다른 몸이지만 사랑으로 하나인 존재가 부부 관계이다. 부부만이 아니다. 가족관계 나아가 이웃관계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다.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하나인 관계에 있다. 하나님과 한 몸인 관계, 사랑으로 하나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몸인 관계에서는 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25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사랑하는 관계에 관하여 말씀 나누었지만 한편 이 세상은 미움의 증오의 관계도 있다. 본문 이후에 나오는 인간의 타락(선악과 사건) 이후 인간은 죄악 가운데 문제를 않고 산다. 하나님을 멀리 하면서부터, 인간이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서부터, 교만하여 하나님 없이 하나님으로 살아가려 할 때부터, 인간은 홀로 고립되어 인간의 자리를 벗어나 외로이 사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4장의 가인과 아벨 사건이다. 가인과 아벨 사건부터 미움과 증오와 싸움과 전쟁이 그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 즐겁고 반가워야 할 관계가 만나기 싫어하고 부끄러워하는 관계로 바뀐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관하여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3장의 선악과 사건이다.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인간 교만의 상징이다. 혹자는 가인과 아벨 사건 또는 선악과 사건을 인간 이기적 목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말한다. 일면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 되어 살고자 하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인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기심,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것에서 싸움과 미움과 증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증오의 관계다.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님 믿지 않고 살겠단 것으로 발생한 것이다.

혹 여러분들 중에는 믿는 사람들도 이해관계에 누구보다 밝다고 하면서 믿는 사람들이 더 이기적이다고 할지 모른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반성해야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성에 관계에 관한 것이지 믿음 자체에 관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기독교인 보다 더 도덕적이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어떻든 기독교인의 진실성에 관할 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3. 결론, 믿음과 사랑과 전도

하나님과 함께 하나 되어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란다. 사랑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믿으며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란다.

타락한 인간을 용서하며 나뭇가지로 그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려 주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 하나님 사랑하며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내 이웃에 불신자들이 많다. 하나님 믿고 살도록 사랑의 관계를 맺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그것이 전도다. 전도하므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고 진실한 사랑을 하는 관계로 인하여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하는 어린 왕자처럼 살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관계를 맺어 사랑하며 살기를 축원한다.

전도하여 사랑하며 하나님 믿고 사는 세상 만드시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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