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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1설교 영원한 생명의 삶 예레미야서 12장 1-6절 본문
20211121설교
영원한 생명의 삶
예레미야 12장 1-6절
1. 세상은 문제 많은 부분이 있어도 망하지 않고 돌아간다. 지난주 요소수 품귀 현상이 있었어도 화물기사 등 아우성이었지만, 그런데도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다.
위드 코로나 했지만 코로나 확산이 만만치 않다. 백신 맞으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효과가 3-5개월이라니 6개월이 지나면 급박하게 효과가 없어진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1년은 갈 거라고 생각하고 맞지 않았나? 6개월도 안된다니 어이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다. 코로나 해결은 요원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문제가 많다. 그럼에도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어도 세상은 의연하게 작동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 있는 세상과 사람들을 보고도 별 문제 아니라고 하고 오히려 뭐가 문제야 하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은 강하게 비판하고 심지어 감옥에 가두기도 한다.
그렇게 세상은 우리 생각이나 상상을 넘어 모든 것을 포괄하며 여전히 운영된다.
20대 대선 후보는 현재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 심상정 김동연 허경영 등이다. 다들 문제가 많다. 여, 야 당 경선 전 야당 후보자 본인과 그 부인과 장모 문제로 그는 후보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어떤 친구는 말했지만,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문제없다 하며 그를 야당 후보로 내세웠다. 여당 후보도 좀 정도 차는 있어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한다. 혹자는 비리 후보들로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지는 사상 초유의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선 주자 교체가 있을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도 대선 선거 운동은 진행되고 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후보들도, 대선 진행과정도 온전하지 않다.
왜 세상은 온전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선하신데 어떻게 악이 존재하는가?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는 악의 존재가 신의 속성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다른 말로 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신정론(그리스어 떼오스 디케 θεός δίκη, 독일어 테오디체 Theodizee, 프랑스어 떼오디체 théodicée 영어 띠오더씨 theodicy)에 관한 문제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한 지혜와 덕의 이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인물이라고 평가받은,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은 "신은 선하다. 전능하다. 그러나 악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모순이다. 따라서 어떤 것 중 하나는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신의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문제가 많다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온전한 하나님이 존재하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푯대로 발전 변화하는 세상이기를,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올바른 세상을 바라고 사는 것이 인간이다. 불완전하고 불공정하지만 누구나 평등하고 공정한 세상을 바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잣대 기준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고 다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만 남을 것이다. 사악해지는 것이다.
올 대선의 시대적 관심은 공정이다. 공정하지 못한 세상이기에 공정을 바라는 것이다. 이는 여, 야를 막론한다. 부모 찬스나 돈 찬스, 권력 찬스 등등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본문 예레미야서 12장 1-6절에서 예레미야는 악인들이 형통하고 배신자들이 잘되는 불공정한 세상에 관하여 하나님께 항의한다. 하나님은 현재 보이는 불공정으로 인하여 미래에 드러날 결과를 생각해서 현재의 불공정을 믿지 말라고 답한다. 공정한 그날은 현실은 아니지만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질문 항의한다.
1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세상이 불공정한 이유?)
2 주님께서 그들을, 나무를 심듯이 심으셨으므로(하나님은 공정하신데 하나님이 불공정하게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열매도 맺으나(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이나), 말로만 주님과 가까울 뿐, 속으로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그런데 불공정하다.)
3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아십니다. 주님은 저의 속을 들여다보시고, 저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있음을 감찰하여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도살할 양처럼 끌어내시고, 죽일 날을 정하셔서 따로 갈라내 두십시오.
4 이 땅이 언제까지 슬퍼하며, 들녘의 모든 풀이 말라 죽어야 합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죄악 때문에, 짐승과 새도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불의한 자와 의로운 자가 다르다. 불의한 자로 인하여 자연도 훼손되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항의에 하나님이 대답한다.
5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네가 조용한 땅에서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요단 강의 창일한 물 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어찌 살겠느냐?) (평안하고 공정한 상황만이 아닌 악한 불공정한 상황도 있음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
6 그렇다. 바로 네 친척, 네 집안 식구(아나돗의 제사장들)가 너를 배신하고, 바로 그들이 네 뒤에서 소리를 질러 너를 욕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와도, 너는 그들을 믿지 말아라."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고 그것을 하나님께 항의하니 하나님은 그 상황에서 살면서 그 불공정을 제대로 인식하고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손볼 때를 예비해두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불공정한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올바르지 못한 세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라는 말이다. 이겨내야 한다는 말이다.
3. 죽음의 현실과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 나라 삶
올바르지 못한 (죽음이 있는) 세상에서 올바르지 못한 행동 (죽음을) 용인할 수는 없다. 바꿔져야 한다. 올바르지 못한 세상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시작이어야 한다. 죽음은 현실에 있고 영원한 생명은 현실 속 하나님 나라에 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죽음의 올바르지 못한 불공정한 현실에서 영원한 생명의 온전하고 공정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간다.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은 그의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에서 "삶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목적"이며,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역설한다.
수회 내한 강연 한 독일 신학자 몰트만(Jürgen Moltman)은 그의 책 "희망의 신학(Theology Hoffnung)"에서
마르크스주의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희망 원리(Das Prinzip Hoffnung)"를 적용하여 십자가의 절망적인 현실을 부활이라는 희망의 빛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언약속한 진정한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약속하는 온갖 유토피아에 반대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말한 것이다. 현실의 악한 불공정의 실존주의를 극복하고 미래의 공정한 유토피아의 역사적 종말론을 말한 것이다. 언약 속의 신학인 구약과 그리스도 종말 재림(파루시아 παρουσία) 신학인 신약을 연결 중재한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안(in)이나 밖(out)이 아니라 세상 앞(front) 미래에 있다고 했다. 미래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말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타파하고 미래 희망을 유토피아 예수의 부활과 영생의 희망으로 말한 것이다. 현실 변혁을 위한 희망의 신학인 종말론을 말한 것이다. 미래에서 현실을 보자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몰트만의 마지막 저작이자 죽음의 문제를 다룬 "나는 영생을 믿는다(Auferstanden in das ewge Leben)"에 관한 내용은 조선일보 보도 기사를 인용한다.
아래는 조선일보 종교전문기자 김한수의 "獨 94세 신학자 “내 묘비명엔 사망 아닌 부활 날짜 새길것”"이라는 제목의 2020년 12월 4일자 기사전부 인용이다.
올해 94세 노(老)신학자가 제자에게 물었다. “내 비석에 무슨 글을 새길지 아느냐.” “출생일과 사망일이겠죠.” “아니, 출생과 부활의 날짜다. 내가 죽은 날에 나는 부활할 것이다.” 독일의 저명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 작년 한국을 찾았을 때 제자 이신건과 나눈 대화다. 최근 이씨의 번역으로 출간된 ‘나는 영생을 믿는다’(신앙과지성사)는 노신학자의 삶과 신앙, 신학이 녹아있다. 몰트만 박사의 일생은 20세기 독일 현대사와 겹친다. 청년 땐 나치에 징병돼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영국군 포로 생활도 했다.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스코틀랜드의 포로수용소에서였다고 한다. 종전 후 괴팅엔대 신학부로 진학해 개신교 신학을 전공했다. 국내에도 ‘희망의 신학’ 등 저서가 소개됐다. ------ 스스로 ‘마지막 책이 될 것’이라고 밝힌 ‘나는 영생…’에선 90대에 접어들어 상처(喪妻)한 후 느끼는 쓸쓸함도 감추지 않는다. “나의 아내 엘리자베트가 2016년에 사망한 이래 나의 관점은 바뀌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나에게 개인적인 문제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또 책을 쓴 목적을 ‘죽음의 기술’이 아니라 ‘부활의 기술’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죽음의 기술은 우리가 오직 한 번만 실천할 수 있지만, 부활의 기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 실천할 수 있다”고 적었다. 책은 예수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죽음 후에도 생명은 존재하는가?’ ‘영원한 생명: 우리는 무엇에 대해 질문하는가?’ ‘우리는 죽는 순간에 부활할 것이다’ ‘살아있는 영혼의 죽음과 깨어남’ 등으로 이어지며 묵직한 울림을 던진다. ‘시간의 매 순간은 미래의 시작이다. 그리고 과거는 원래 지나간 미래다. 출생이 죽음보다 앞서듯이, 미래는 과거보다 앞선다’ ‘영원한 안식은 영원한 죽음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등 잠언 같은 구절도 즐비하다. 몰트만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조상 숭배는 뒤를 향해 ‘시조(始祖)’들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앞을 향해 죽은 자들의 부활과 하나님의 미래 세계의 생명을 지시한다”며 “이 미래의 희망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셸리 케이건이나 몰트만이나 모두 죽음이 있는, 문제가 있는 인간 현실을 말하고자 했다. 불공정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은 문제가 있고 모순되지만, 그래서 그 극단은 죽음이지만, 이 현실을 영원한 삶을 위해 제대로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꼴 보기 싫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어도 끊임없이 계속 작동된다. 이해하기 어려워도 현실을 직시하며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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