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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믿음, 소망에 의지와 사랑 실행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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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믿음, 소망에 의지와 사랑 실행 고린도전서 13장 1-3절

필명 이일기 2022. 3. 29.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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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믿음, 소망 의지와 사랑 실행

고린도전서 13장 1-3절

 

 우주의 나이는 138억 광년(1광년=1년동안 빛이 이동한 거리=300,000*60*60*24*30*12km=9,331,200,000,000km의138억배=1.2877056*10의 23제곱km=10경km, 일, 십, 백, 천, 만, 억, 조, 경, 해, 자, 양, 구, 간, 정, 재, 극, 항하사, 아승기, 나유타, 불가사의, 무량대수, 대수, 업 단위)이고, 관측 가능한 우주(Observable Universe)의 크기는 지구를 중심으로 반경 465억 광년(약 4.399×1026 m)이므로 총 930억 광년(70경km)의 규모다. 이해하기 쉬운 수로 말하면 1,000억 광년이다. 관측 가능한 우주 외부의 '전체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추정할 방법조차 없다. 전체 우주가 무한하거나, 유한하고 끝이 없거나, 유한하고 끝이 있다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상을 초월한 어마어마한 공간을 가지고 있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아름답게도 그 반대로도 볼 수 있다. 그렇게 살 수 있다. 

 

 우리는 세상과 사람들을 잘 모르기는 해도 어떻게 해야 좋은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는지는 알고 있다. 전에도 말씀 나눈 것처럼 현실은 보기에 따라 다르다. 좋게 보면 좋고 나쁘게 보면 나쁘다. 상황이 어둡더라도 그것을 부정하고 좋게 보면 밝게 된다. 마치 공간은 무한하여 어디에도 살 수 있듯이 그렇다. 문제가 쌓여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밝은 세상을 보면 아름답다. 그렇게 믿고 굳은 의지를 가지면 행할 수 있다. 성경 말씀처럼 믿는 대로 된다. 우리 능력을 뛰어 넘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어떤 것들이 작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관계에서만이 아니다. 건강문제, 하고자 하는 어떤 일, 이루고자 하는 어떤 꿈, 소망, 어떤 것도 그렇다. 

 

 마태복음 9장 27-31절은 눈 먼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눈을 뜬 사건 기록이다. 믿는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면서 예수를 뒤따라 왔다.

28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눈 먼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예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다짐하셨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지역에 퍼뜨렸다.

 

 똑 같은 사건이 다른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 10장 46-52절, 마태복음 9장 27-31절, 마태복음 20장 29-34절, 누가복음 18장 35-43절, 요한복음서 9장이다. 이것은 명백한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한 것임을 나타낸다.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눈 먼 사람의 구체적인 이름(바디메오)까지 나온다. 바디메오는 바(아들) + 디메오( 혼돈 불결)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죄인으로 취급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의 능력을 뛰어 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어떤 것을 통하여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한 것이다. 어두운 죄를 보지 않고 빛을 보게 한 것이다.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을 말함이다.

 마가복음 10장 46-52절을 보자.

46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5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요한복음 저자는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따진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단순히 눈 먼 사람을 눈 뜨게 했다고만 하지 않고 그 배경을 설명한다. 단순히 믿음대로 된다는 것을 넘어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판할 의도까지, 곧 당시 사회상을 비판하는 목적까지 포함하고 있다. 요한복음서 9장을 보자.

1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4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8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인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 하였다.

9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또 더러는 "그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10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11 그가 대답하였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12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된 사람에게 묻기를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하니, 그는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비뚤어진 바리새파 사람들
13 그들은 전에 눈먼 사람이던 그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
15 바리새파 사람들은 또다시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에 내가 눈을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말하기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였고,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표징을 행할 수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졌다.
17 그들은 눈멀었던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18 유대 사람들은, 그가 전에 눈먼 사람이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마침내 그 부모를 불러다가
19 물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당신의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20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21 그런데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가 자기 일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22 그 부모는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대 사람들이 이미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23 그래서 그의 부모가, 그 아이가 다 컸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말한 것이다.
24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멀었던 그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서 말하였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25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6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네게 한 일이 무엇이냐? 그가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하였느냐?"
27 그는 대답하였다. "그것은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말하였다. "너는 그 사람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29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30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31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
32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하였다는 말은,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33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34 그들은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바깥으로 내쫓았다.

참으로 눈 먼 사람
35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그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38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 절하였다.
39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말하였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장애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로 인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눈 먼 사람이고 죄인이다." 이렇게 인식한 것은 세상을 다르게, 밝게 보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밝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소망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도하던 세상, 사회는 자신의 이익만을 최선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무시하며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였기에 각박하고 자기 중심적이었으며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둠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곳에 예수가 등장하여 그 반대의 삶을 가르치고 실천했으니 그를 알던 사람들은 추앙할 수 밖에 없었고 엄청난 회오리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 핵심은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여망과 갈망이었다. 바울은 그런 측면에서 예수를 바라보았다. 예수는 사랑을 실천한 구세주였다.

 

 고린도전서 13장

1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다 필요 없고 사랑만이 고귀한 가치라는 말이다. 눈 먼 사람을 눈 뜨게 한 것은, 그리고 세상, 사회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한 것은 기적이나 구원 보다 밝은 사랑으로 봐야 한다.

 오늘날 기적과 구원으로 인하여 이기적으로 변질된 기독교가 되었지만 본래 기독교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은 밝은 빛이다. 빛을 보며 사랑하며 살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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