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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남원 주천면

필명 이일기 2026. 6. 16.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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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남원에 대한 역사와 지명이 문헌 기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다. 백제 때 '고룡군(古龍郡)'이 최초 이름이며, 신라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신문왕 5년(685)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눌 때 현재의 남원 땅에 소경(小京)을 설치했고, 경덕왕 16년(757)에 '남원(南原)'이라 고쳤는데, 이때부터 남원이란 지명을 처음 쓰게 되었다. 후한의 건안년 사이에 대방군이라 하였다. 조위시대에는 남대방군이라 하고, 뒤에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을 보내 백제를 멸망시키고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대방주 자사를 겸임토록 하였다. 신라 문무왕이 그 땅을 병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문왕 5년 소경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은 남원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940)년 행정구역을 개혁할 때 부(府)라 하였고, 충선왕 2년(1310)에는 다시 대방군이라 하였으나 뒤에 남원군이라 하였다ㅈ. 공민왕 9년(1360)에 다시 부로 승격하였고,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으며, 세조 때 처음으로 진(鎭)을 두었다."이상에서와 같이 현재의 남원지역은, 고룡군(古龍郡) - 대방군(帶方郡) - 남대방군(南帶方郡) - 대방주(帶方州) - 남원소경(南原小京) - 대방군(帶方郡) - 남원군(南原郡) - 남원부(南原府) -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등으로 변천하여 왔다. 이러한 관계에서 현재의 남원은 처음에는 '고룡(古龍)'이라 하였고, 때로는 '대방(帶方)'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또한 '용성(龍城, 고려 공민왕 9년 남원부의 별호, 조선 철종 4년 남원읍의 별호)'이라 애칭 되기도 했다. 따라서 서기 15년 처음 고룡군으로 불려지기 시작한 후 742년 만인 757년에 '남원(南原)'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수도(위례성)에서 볼 때 현재의 남원은 남쪽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남방(南坊)'이라 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그 뒤 백제가 멸망하고 이 지역을 당나라 군대가 지배하게 되면서 옛날의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북쪽에 있던 대방군의 이름을 본 따 이곳을 '대방군' 또는 '남대방군'이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통일신라 때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고 난 뒤 이곳을 '남원소경'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당시 신라의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남원이 서남부지역에서는 가장 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쪽의 근원이라는 의미로 '남원'이란 지명으로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그 사이에 분지를 이루고 있는 남원은 지정학적으로 사람의 목구멍과 같이 중요한 위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남원이라는 이름은 남원소경이라고 부른 757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고 불러져 왔던 것이다.

 

 조선조 5백여 년과 지금에 이르는 동안 남원 역사 의미가 큰 것들
 첫째,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있었던 남원성(南原城) 싸움이다. 명나라 구원병 3천여 명과 전라병사 이복남 장군이 이끈 조선 병사 1천여 명, 그리고 주민 등이 왜적 5만6천8백여명과 8월 12일부터 16일까지 싸워 모두 순절하였고, 남원성은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는 일본 종군승경념의 기록처럼 초토화되었다. 이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시신을 거두어 한 곳에 묻고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충열사(忠烈祠)를 짓고 사당 중앙에 '남원부성 순절 만인지위' 란 위패와 좌우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해 50여 명의 위패를 모셨는데 오늘날 만인의총(萬人義塚)이다. 또 임진·정유난때 활동한 양대박·조경남·황진 등 세 사람을 남원의 삼웅(三雄)이라고 부른다. 양대박은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임실 운암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고, 황진은 충청 병마사로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으며, 조경남은 의병장 남원성 싸움때 유격활동을 하면서 많은 왜적을 물리친 사람이다. 정유재란 때의 남원성 싸움에 대한 생생한 전황은 그가 일기식으로 기록한 난중잡록(亂中雜錄, 지방 유형문화재 107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둘째, 조선초기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가 남원에 유배 와서 1419년 지금의 광한루의 전신인 광통루(廣通樓)를 세운 것이다. 그 뒤 1444년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광통루를 광한루(廣寒樓)로 그 이름을 고쳤고, 전라관찰사였던 정철이 오늘날과 같은 정원을 꾸며 천체 우주를 지상에 건설한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만들어졌다. 그 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불탄 것을 1626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여 6.25전쟁 중에도 잘 보존하여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원으로 손꼽히고 있다. 광한루는 보물 제281호, 광한루원은 사적 제303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셋째, 남원은 조선조 숙종(肅宗)시대를 배경으로 쓰인 고전소설 '춘향전'과 '흥부전' 그리고 '변강쇠가'의 무대가 된 문학의 고장이다. 임진·정유재란 이후 조선 사회는 급속도로 신분질서가 해이되고 사회의 혼란을 가져와 그 시대를 배경으로 새로운 질서를 찾고 사랑을 통해 인간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작품들은 천체 우주의 질서를 상징하여 지상에 건설한 광한루원이 지닌 의미와 천부지지(天府之地)라는 남원 땅의 속성을 통해 이러한 작품들이 쓰여 남원이 지닌 역사와 문화적 의미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밖에도 남원을 무대로 김시습은 '금오신화' 중의 한편인 '만복사저포기'를 통해 사랑의 정신을 남겼고, 조위한은 '최척전'이란 작품을 통해 가족의 중요성을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을 배경으로 전하고 있다.


 넷째, 1740(영조 16)년 남원도호부가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되어 전국의 360여 개의 고을 중 맨 끝에 두었던 사실이다. 당시 출생지가 남원이었던 양찬규라는 사람이 역적모의를 했다는 이유로 강등되었는데 다행히 10년 후인 1750(영조 15)년에 다시 복호(復號)되었다.


 다섯째,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동학군이 남원 점령과 관음치 전투의 패전이다. 동학군 접주 김개남이 1300여 명의 동학군을 거느리고 남원에 들어와 교룡산성에 주둔하면서 경상도로 진출을 도모하다 남원과 운봉의 경계인 관음치와 방아재에서 운봉현의 민보군 박봉양군에 의해 패하여 남원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남원성을 포위한 운봉 민보군에 의해 남원성의 남문과 동문이 파괴되었다. 특히 동학군은 춘향전에 나오는 어사시 금준미주 천인혈 운운하는 시를 군가로 불렀다고 전해 온다.

 여덟째, 동족상잔의 아픔인 지리산 빨치산토벌 작전이 남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이때 순국한 6,333명의 영령을 모신 충혼각이 광한루원에 세워졌다가 지금은 지리산 뱀사골 국립공원 지리산 북부관리사무소 옆으로 옮겨졌다.(출처, 남원 문화원)

 

 남원 17개 시읍면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북서서 방향 남원시는 지리산 가까이에서부터 산내면 인월면 아영면 운봉읍 주천면 이백면 산동면 남원시 송동면 수지면 주생면 대산면 사매면 덕과면 금지면 대강면 17개 시읍면이 있다.

 

 남원시 주천면

 주천면(朱川面)은 주촌과 원천을 합한 이름이다. 

 지도상으로는 고기리 덕치리 호경리 용궁리 은송리 장안리 송치리 배덕리 주천리 호기리 용담리 11개 리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하주리, 상주리, 배촌리, 덕촌리, 웅치리, 중송리, 하송리, 용담리, 호곡리, 신기리, 안곡리, 무수리, 외평리, 행정리, 내기리, 고촌리, 회덕리, 노치리 18개 리다.

 

 주천면 내 지리산에는 정령치,

선유폭포,

구룡폭포,

용호서원,

육모정,

춘향묘,

보물 용담사 석조여래입상,

유형문화재 용담사 칠층석탑과

난중잡록

과 원동향약,

민속문화재 석장승

이 있다. 

 

 남원시 주천면 주천리

 주례기(周禮基) 상주마을은 1650년(조선시대 효종왕 초) 협계태씨(浹溪太氏)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나 형편이 어려워지자 다른 마을로 분산되어 떠나고, 1700년경 진주 소씨(晉州蘇氏) 소경준(蘇炅俊)의 7대 할아버지가 들어와 정착을 하면서 그 자손들이 번창하자 소씨촌(蘇氏村)이라 부를 만큼 소씨들이 번창하였다. 1770년경에는 주천리 하주(下周)마을로도 이주하였다.
 주례기(周禮基) 하주마을은 1650년 신안주씨가 처음 정착한 뒤 하씨, 유씨, 박씨 등이 차례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지금 현재는 주씨와 하씨는 각처로 이사하고 1770년경 진주 소씨(晋州蘇氏)와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한씨(韓氏) 집성촌이 되었다.
 주례기 뒷산 원동산은 333.3m 높이의 모습이 연꽃 봉오리가 활짝 피어 있는 연화체상(蓮花體狀) 형국이고, 마을의 남쪽이 훤하게 트여 한 가닥 산줄기가 삥 돌아 다시 본 산과 맞서는 회룡고조형(回龍顧組形)으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뚜렷하고 세 갈래의 골짜기 물줄기가 한 곳에 합쳐 삼합수가 되어 이 주촌천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마을이 남향으로 아담하여 비옥한 넓은 들과 풍부한 물이 있어 주민들이 부지런하여 삶이 넉넉하였으므로 자녀교육에 힘써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왔다.
 이러한 자연 환경으로 인해 옛날부터 이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주역(周易)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지나가던 승려가 이러한 광경을 보고 '주역을 읽어 예의가 바른 마을(터)'라고 했는데 이때부터 주례기(周禮基)로 불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학문과 선비의 격이 풍기는 주례기 마을 앞의 하천이 산 밑을 돌아간다 하여 주천리(周川里)로 바꾸었다. 주례기의 일부인 위쪽(上部)을 상주(上周), 아랫부분(下部)을 하주(下周)라 하는데 상주례기(웃주례기), 하주례기(아랫주례기)로 통용되고 있다.

 새터는 주례기가 생기고 난 후 새로운 터란 말이다.

 외양골은 주례기 외양 골짜기 마을이다.

 고주로(1960년대는 신작로라 불렸다.) 

 주촌천은 시냇물이다. 

 송장골은 송장들이 많았던 골짜기 

 무데미골 무덤들이 많았던 골짜기

 중개재골 

 쇠바위골

 거미실골

 원동산

 

 남원시 주천면 배덕리

 배덕리는 배촌과 덕촌을 합한 것이다. 
 배촌은 본래 잿말, 또는 금반옥배혈(金盤玉盃穴)이 있어 배촌(盃村)이라 했다. 1650년경에 남평문씨(南平文氏)가 처음 이주, 정착하여 형성되었으며, 점차 쇠퇴하고 이씨가 들어와 문씨와 혼인하고 재산을 모으기 시작하여 이씨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마을 뒤 ‘사자목’이라는 산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제봉(皇帝峯), 여자를 상징하는 옥녀봉(玉女峯)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술을 상징하는 주류동(酒流洞)이 있고, 마을 서편에 왕호(王湖)가, 건너편에는 술잔을 뜻하는 옥배(玉盃)와 술상을 뜻하는 금소반(金小盤)이 있는 금반옥배(金盤玉盃) 형국이라고 한다. 이러한 마을의 지형을 따라 금반옥배를 줄여 배촌으로 불렀다. 부자와 인물이 나는 땅으로 전해진다.

 덕촌은 질병과 액운을 벗어나 평안히 살려면 호랑이 잡는 덫을 놓아 개를 보호해야만 된다 하여 마을 아래 함전이라는 곳에 큰돌올 덫을 놓았다고 한다. 마을 입구 돌무덤이 있어 덫을 놓았다 하여 덫몰이라 불렸는데 덧말, 덤몰이라 부르다 한자로 바꾸면서 발음을 따라 큰 덕(德)을 써서 덕촌이 되었다. 처음으로 마을을 이룬 것은 형씨(邢氏)들이 들어왔으나 현재는 한 집도 없고 그 후 김씨가 현재까지 9대 자손이 살고 있고 이어 박씨, 이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의 동쪽이 범이 먹이를 찾는 형상이어서 범고개로 불렸는데 마을 뒷산 서쪽이 개가 밥을 먹는 형상으로 개상굴로 불렸다. 마을 위쪽 품질 좋은 기와 굽던 기와막이 있었다 한다. 대밭 위에는 영감과 할매 당산이 있어 정월 초사흘에 당산제가 열렸다고 한다. 마을 중대사를 이끈 좌상이 있었고 그를 보좌하는 총각대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진평전

 동마골

 곰장골

 동마제

 배촌저수지

 견두산

 밤재

 

 남원시 주천면 송치리

 동송리와 서송리와 웅치리를 병합하여 동송과 웅치를 따서 송치리라 했다. 웅치, 중송(모래터), 하송(송구)이 있다.
 송치리 웅치마을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 이씨들이 피난와서 살기 시작하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후 전주 최씨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커졌다. 마을 앞 동남쪽으로 자리 잡은 산이 곰의 형국으로 곰이 누워서 새끼곰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과 같아 하여 마을 이름을 ‘곰재’ 또는 ‘곰치’라 부르다 한문 표기에 따라 웅치가 되었다.

 송치리 중송마을은 1592년 임진왜란에 전주 이씨들이 피난와 살면서 형성되었고, 그 후 전주 최씨들이 들어와 커졌다. 이후 김해 김씨가 들어왔고, 밀양 박씨가 들어왔다. 큰 정자나무 3그루가 있다하여 삼정지라 하고, 마을앞 송치천 건너 언덕에 최씨 제각 자리에 모래가 많이 쌓여 있어 모래뜸 또는 모래터라 불렸다. 

 송치리 하송마을은 100년경 중국에서 신안 주씨가 처음 정착하여 후학하고 부지런하며 세가 강해 주례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동촌에 김해김씨가 들어와 살았다. 송구(松九)라고 불러왔는데, 마을이 뱀의 형국으로 언덕 송림에서 9마리의 뱀이 나와 생긴 이름이다.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육바우가 있는데 여섯 개의 큰 바위가 층을 이루고 장엄한 산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뱀의 형국을 이루고 있는 언덕의 끝부분에 두꺼비 바위가 있고 산등성이에는 여러 개의 묘가 있다. 용양사는 주씨들이 송나라 주자의 영정을 모시고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밤재(전남과 경계에 위치한 밤재는 춘향터널 위 밤재와 구분하기 위해 앞밤재라고 한다.)

 쑥고개로(195,60년대는 신작로라 불렸다.) 

 송치천

 가재골

 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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