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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0050522 제목 : 낙인찍힌 새 인간 성경 : 갈라디아 6장 11-18절

필명 이일기 2018. 12. 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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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2

제목 : 낙인찍힌 새 인간

성경 : 갈라디아 611-18

 

1. 지난주 공원에서 초등학생 3-4학년 5명이 축구하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한명은 규칙도 잘 알고 기술도 좋아 슛도 잘하였습니다. 반대편 학생 중에 연약해 보이나 경쟁심이 있고 체형이 그리 좋지 않은 학생이 있었습니다. 8:2로 경기 하다가 잘하는 학생이 또 꼴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꼴이 키퍼가 잡는 순간 꼴 라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를 놓고 꼴이라고 하고 키퍼가 잡았다가 들어갔으니 아니라고 하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정확히는 꼴인데 그 경쟁심이 있는 아이는 꼴이 아니라고 우겼습니다. 지기 싫어하는 아이였습니다. 결국 싸움이 붙었습니다. 지기 싫어하는 아이가 잘하는 아이를 때렸으나 잘하는 아이는 맞으면서도 자신은 상대를 치지 않았습니다. 어이없어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지기 싫어하는 아이의 자존심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되려 이 자존심이 많은 경쟁심이 많은 아이가 잘하는 아이에게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진정 이기적인가? 아닙니다. 그 아이의 자존심에서 상대를 이기적이라고 우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 이기적이라고 불신자들이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해했습니다. 오해한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가 배타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는 다종교 사회라는 것이지요. 왜 불교도 있고 유교도 있는데 기독교만을 내 세우냐는 것이지요.

그러면 실제 기독교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살펴볼까요? 본문은 할례주의자와 우리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바울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본문을 살펴봅시다.

 

2. 본문

할례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 아멘

 

본문은 갈라디아서 마지막 단락입니다. 개역번역은 할례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제목을 달았고, 표준새번역은 마지막 경고와 인사라고 했으며, 공동번역에는 마지막 권고와 인사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마지막을 바울이 직접 강조하여 쓴 본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본심과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문제를 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할례냐 무할례냐의 문제를 빙자하여 자신의 욕망과 지배권을 드러내려 사람들을 혼란케 한 일군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습니다. 저들은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하고, 그런 자세로 세상을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도록 하는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통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말을 듣도록 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자신들이 옳다고 하는, 겉모양만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극도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로 인하여 진실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없어지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것은 없어지고,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일이 발생하여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과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할례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었느냐,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느냐가 더 중요한데도, 사람들이 겉치레에 더 관심을 갖고, 자기 욕심을 부려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바울은 그것은 자신이 변화되기 전의 생활과 같았음을 인식하고, 이제 자신은 변화되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고 있고, 또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고난을 몸에 새겨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하는데도, 자존심 강한 사람들로 인하여, 반대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이들에게 경고 또는 권고하며 이 갈라디아서를 맺고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1-21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사람이 되어 그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특히 17절의 말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의 말씀처럼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을 말하는데 본문 17절 예수의 흔적이 있는 사람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예수의 낙인 찍힌 사람의 삶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장이 센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다거나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거나 성령 충만하다거나 하는 것은 다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십자가를 흔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분을 굳이 짖는 것은 분열주의입니다. 달성하지 못할 일을 행하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행하도록 하고 자신을 그런 것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까? 유대주의자 할례주의자 그것도 진실한 할례주의자들이 아닌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지 않고 남에게 지도록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신자에서 신자로 변화된 사람은 예수의 낙인이 찍힌 사람입니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물론 이들에게 부활의 희망이 있습니다. 상급이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십자가로 고통스러워도 하나님 앞에서는 평강과 은혜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외형적인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로 살지 않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우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해를,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사람들입니다.

구약적 분류법(선과 악)에 의하여 본문에 있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할례를 쫓는 사람, 율법을 추종하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교만한 사람,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사람, 육체의 모양을 쫓는 사람,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 남을 자신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 겉치레를 좋아하는 사람, 악한 사람들과

새로 지음 받은 사람(새로운 피조물), 복음(하나님의 의)을 추종하는 사람, 십자가(고난)를 지는 사람, 성령의 인도를 받는(성령 충만한) 사람, 예수의 낙인이 찍힌 사람, 신령하고 거룩한 예수의 성도, 예수를 믿는 신자, 교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 마음 가운데 천국이 있는 사람, 예수가 있는 사람,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사람, 영생을 소유한 사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선한 사람

한마디로 매순간 하나님을 믿고 예수의 흔적이 몸 안에 있어 그것이 작동되는 사람과 그것이 작동되지 않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이 있는 사람 새로운 피조물은 결코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3. 그런데 왜 이렇게 예수의 흔적이 있는 사람들인데도 사람들이, 불신자들이, 심지어 믿는 신자들조차 우리 기독교인들을 보고 이기적이라고 합니까?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갖고 있음에도 할례주의자들처럼, 형식적인 유대 율법주의자들처럼 진실한 예수의 흔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나, 그리고 예배드릴 때에나 신자지, 세상 속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내 욕심 챙기고, 내 주장하고, 교만하고, 나 먹고살기에 바쁘고, 먹고살기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사람들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자존심만을 드러내어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고 세상 가치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어떻게 매순간 하나님 믿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느냐고 질문하고, 의문을 갖습니다.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매순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르띠즈 목사님은 말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본래 하나님이 주신 양심대로 사는 것을 말하고, 그 양심에 따라 매 순간 하나님과 대화하며, 큰소리로 기도할 것도 없이, 달라고만 하지 않고도, 내 형편을 말하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으면 하나님은 나의 선한 양심 속에 응답하시고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매순간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르띠즈 목사님처럼 예를 들어 볼까요?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오늘 새로운 날이 밝았군요?” “그래 오늘 하루도 힘차고 활기차기 살거라.” “잠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이 찌쁘덩 합니다.” “어제 무리할 필요도 없었는데 무리했구나 무리하지 않아도 되었지 않니세수를 합니다. 아이들을 깨워야 합니다. 아이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 문제로 하나님 속상합니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원해서 행동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니? 강압적으로 굴지 않아야 한다아침 식사를 합니다. 등등

이 하나님과의 대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우리의 선한 양심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 마음 가운데는 자신의 교만을 죽이게 하고, 십자가를 지는 선한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선한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선한 양심을 갖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거부하는 교만에 휩싸인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을 쫓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은 양심이 삐뚤어져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의 유일무의 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 가치관으로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남을 자신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배 하에 두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예수의 흔적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흔적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로 낙인찍힌 삶을 삽시다. 그 길이 평안한 길입니다. 내 자존심만을 내가 옳다고 하는 생각에 젖어 매몰되지 않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여러분 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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