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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4 제목 :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성경 : 마태복음 2장 18-25절 본문
20061224
제목 :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성경 : 마태복음 2장 18-25절
예수의 탄생(눅 2:1-7)
18 예수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므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20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5)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는 '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의 그리스어 형태
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23 6)"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사 7:14(칠십인역)
24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25 그러나 7)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첫 아들을'
누가복음 예수의 탄생(마 1:18-25)
1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온 세계가 호적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2 이 첫 번째 호적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3 모든 사람이 호적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동네로 갔다.
4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중이었는데,
6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7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1. 차도가 있는 곳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인도가 있다. 사람이 다닐 때 어느 쪽으로 다니는 것이 좋은가? 답은 차는 오른쪽, 사람은 왼쪽이다. 요즈음은 사람들이 이걸 구분 안하고 다닌다. 인도가 뚜렷이 구분되는 곳이야 구분 않고 다녀도 되지만, 그렇지 않는 곳은 반드시 구분해서 사람은 왼쪽으로 다녀야 한다. 왜 그런가? 차를 마주보고 대비하라는 것이다. 만약 그런 구분 없는 도로에서 차와 마찬가지로 걷게 되면 뒤에서 오는 차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법칙과 질서를 따라서 인도를 걸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위험하고, 사고 날 가능성이 질서대로 걷는 사람보다 훨씬 많아지게 된다.
인생사는 것은 대부분 이와 같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자연의 질서와 사람들이 그 속에서 배우고 깨달아 만든 법과 관습과 습관을 따라 사는 것은 사람을 안전과 평안과 건강을 위하는 길이고, 행복하게 사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은 그러한 기계적 법과 질서 속에 살도록만 되어 있는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무시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에 순종하며 산다. 이 말은 인간은 본래부터 기계적으로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살고자 한다. 그 결과는 그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다. 원망 할 수 없다.
2. 본문 성경말씀의 예수라는 단어의 뜻은 죄인을 구원하는 자라는 말이다. 또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라는 뜻도 있다. 예수님에게 불려지는 또 다른 이름은 메시야, 그리스도인데, 메시야는 구세주, 그리스도는 특별히 선택한 자라는 곧 기름 부어 구별한, 선택한 자라는 뜻이다. 모두가 성탄과 관련한 말이고 이름이지만, 특별히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다시 반복하면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또는 하나님이 함께하신 자라는 뜻인데, 그러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본문의 말씀이고, 그것은 이미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것임을 본문은 말하고 있고,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한 것이 본문 말씀이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위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함께 하신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 인생에서 고난에도, 그 반대에서도 우리를 위로하시고 돕고 인도하시며 하나 되어 한 몸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을 우리는 믿지 못한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선택하지 않는다.
3. 하나님이 태어나심
그 불신에는 교만한 인간의 의지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와 법칙과 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되며(성육신, Incarnation) 그것도 남녀 생식에 의하여(결합에 의하여)가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곧 처녀를 통하여 이루어지느냐는 것이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 질서를 초월하고 능가하며 불가능이 없다. 때문에 그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우리들에게 결코 불합리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논리적으로도 합당하고 이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불신일 뿐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인 것이다. 사람은 그에게 순종하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사람이 악하여 참으시는 중에 자신이 그 영광 가운데 그가 만드신 이 세상에 오셨다는데, 그것도 사람을 위하여 사람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인간들에게 고난을 받으신 그의 역사와 섭리와 행하신 것을 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역사를 자신이 스스로 행하셔서 자원하셔서 사람들을 위하신 다는데 왜 그것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거부권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이해할 수 없지만 크게 보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마치 욥이 사단의 시험을 당하는 것과 같이, 또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그 하나님의 섭리이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다만 사단의 지배 하에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사단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의지는 사단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단을 따라 사는 것을 선택한다. 서두에 나눈 말씀과 같이 인간을 교통질서를 따라 살아야 하나 그러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 이유는 그가 본래 그런 타입이든가 아니면 자기 편하기 위한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을 만들었고 그를 일정한 질서 가운데 살게 하신 것이다. 거기에 동참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안전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크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는 것이고, 좁게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라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으로 인한 책임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4.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온갖 이유를 대며 그것을 무시하려고 한다.
가이사라는 로마 황제다. BC63-AD14년 동안 통치했던 로마의 첫 황제 옥타비아누스를 말한다. 그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으며,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은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이 그에게 준 호칭이었다. 그 역사적 사실인 호칭이 누가복음 2장 1-7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탄생은 역사적 사실이다.
마크로비우스(Macrobius)가 지은 '축제(Saturaalia)'에 보면 헤롯의 명령으로 시리아 지역의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살해할 때에 헤롯 자신의 아이도 포함되었다는 말을 듣고 당시 로마황제 아구스도(Augustus)가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라리 돼지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구스도 로마황제가 이 사건을 듣고 빈정거렸다는 자체가, 누가복음의 아구스도 황제 때의 호구 조사와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기록과 마태복음의 헤롯의 영아 살해 사건을 동시에 증명해주는 물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경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은 사실이다. 그 사실을 기록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5. 너무 자주 사용한 예화를 든다. 여러분도 다 아는 예화다.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이 16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험한 세월을 보내고 잠깐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27번째로 열병을 앓아 몸이 몹시 쇠약해져 있었다. 사자에게 물린 한쪽 팔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어서 연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글래스고우 대학생들 앞에서 설교를 하면서 아주 감동적인 간증을 하였다. "힘들고 고독한 선교사 생활 가운데서 저를 지탱해 준 것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하신 약속이었습니다."라는 간증이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되고 큰 기쁨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약속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은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수 1:6)고 했다. 그것을 믿고 여호수아는 수많은 어려움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까지 인도한 것이다.
여호수아의 그리스어 형태인 예수, 곧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바울은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고 했다.
6.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부모가 언제나 자녀와 함께 하지만, 강한 자녀보다는 약한 자식에게 더 가까이 가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강할 때보다는 우리가 연약할 때에 더 가까이 오신다. 부모가 자식을 고루 사랑하지만, 불의하고 완고한 자녀보다는 정직하고 순종하는 자식을 더 사랑하듯이, 하나님도 불의한 사람보다는 의로운 사람에게 더 가까이 오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은 두루 나타난다.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에게 해와 비를 고루 내려주신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은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히 더 강력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호수아 1장 7절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는가?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편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사람에게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한,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 하는 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비록 아골 골짜기를 지나더라도, 고통의 골짜기를 헤맬지라도, 하나님은 바로 거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영광의 길로 달려갈지라도, 세상 말로 출세가도를 달릴지라도,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 아니므로 곧 멸망의 지름길인 것이다.
7. 썬다싱 이야기, 모래 위를 주님과 함께 걷는 꿈에 모래사장에 난 두 사람의 발자국 중 어느 순간 한사람의 발자국만 남아 있을 때, 그것은 그 사람이 고통과 환난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 그를 업고 지나갔기 때문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며 기쁜 성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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