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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1주일낮예배 제목 : 하나님 찬양 성경 : 사도행전 2:42~47, 요한복음 10:1~10, 베드로전서 2:19~25, 시편 23 본문
20140511주일낮예배 제목 : 하나님 찬양 성경 : 사도행전 2:42~47, 요한복음 10:1~10, 베드로전서 2:19~25, 시편 23
필명 이일기 2018. 12. 12. 11:1020140511주일낮예배
제목 : 하나님 찬양
성경 : 사도행전 2:42~47, 요한복음 10:1~10, 베드로전서 2:19~25, 시편 23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믿는 사람이 무시당하고 고난 받고 산다. 믿고 산다고 드러내고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죄의식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더구나 이단 구*파와 관련된 세월호 사건으로 더욱 믿음생활이 부끄럽게 되었고, 전도가 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믿는 사람들의 잘못으로 대한민국 사회에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는데 업친데 덥친 격이다.
기독교인은 죄의식을 가지고 고난 받는 삶을 산다. 괴로움 가운데 고뇌하며 살고 있음에도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믿는 믿음생활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죄의식을 가지고 고난 속에도 살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사도행전 2장 42-47절 말씀을 보자.
사도행전 2장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43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친구 목사들 중 공동체를 지향하는 목사가 있다. 믿는 사람들이 함께 살며 영적 공동체를 이루고자 함이었다. 본문의 내용과 같은 공동체를 일구고자 한다. 공동체는 제자들의 초대교회로부터 기독교 전통 중에 있다. 중세에는 수도원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도 프랑스에 떼제 공동체(그랑샹테제 공동체 [Grandchamp-Taize communities, ― 共同體] 20세기 중엽 스위스와 프랑스에 세워진 2개의 개신교 연합공동체. 로저 슈츠는 금욕과 순종, 재산의 공유라는 전통적 방법으로 예배와 헌신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 1940년대에 프랑스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 테제에 남자만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세웠다(그는 나중에 이 공동체의 원장이 되었음). 처음에는 프랑스와 스위스의 개혁교회 신도들만 이 공동체에 참여했지만, 나중에는 유럽 여러 나라(프랑스·스위스·독일·네덜란드·덴마크·스페인)의 개혁교회와 루터 교회 신도들도 모여들었다. 공동체 형제들 가운데 일부는 성직자이고 일부는 평신도로서 전문기술을 발휘하여 공동체의 생활에 이바지했다. 테제 공동체와 연합하는 자매들의 공동체가 스위스 뇌샤텔 근처 그랑샹에 세워졌는데, 똑같은 규율을 지키는 이 두 공동체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통일을 촉진하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삼았다)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살림 공동체를 지향하는 두레공동체(김진홍 목사, 남양만) 등등 많은 공동체가 있다. 세상적인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 믿으며 묵상하며 영적으로 살고자 하는 바람에서 그러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초대교회는 하나의 거룩한 공동체였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였다. 인간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단 유*언의 구*파는 공동체적 성격을 띠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개인의 욕망을 위한 사집단이다. 기독교를 빙자하고 공동체를 빙자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돈을 목적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다. 이단들이 대부분 그렇다. 하나님을 빙자하는 사기 집단이다.
북한이 공산주의 독재체제도 국가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만 그 집단은 김정은을 위한 공동체다. 인민을 위한다고 하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공산 독재 체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0:1~10
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4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5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오늘 우리가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면 우상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간으로, 인간의 욕망으로, 돈이나 권력으로 대치하면 우상이다. 그러한 체제나 공동체는 인간을 위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위하지도 않는다. 오직 개인의 이익만을 위할 뿐이다.
오늘날 죄의식이 사라지고 있다. 죄가 없으면 복음도 교회도 불필요하다. 사람들이 죄의식이 없으니 복음도 인정하지 않고 교회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것과 죄를 무시하는 것은 교만해져서 죄의식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시기 위하여 오셨고 그것을 위해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다.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설교자들이 죄를 설교할 수 없고 복만 내리기를 사람들이 바란다. 성공만 물질만 추구하고 행복과 쾌락만 추구하는 세상이 만사형통하기를 바란다. 물론 죄가 없으면 좋겠다. 그러나 죄는 명백하다. 인간은 타락했다. 한계가 있는 존재다. 복을 빌고 만사형통하기만을 바라면 무속종교나 미신이나 타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 우상 숭배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새긴 우상,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에 불과한 것들에게 기도하고 마음의 평안을 빈다. 돈이 신이 된 세상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한마디로 죄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돈 많은 인간, 성공한 인간 찬양이 횡횡한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인간이 만든 우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특정한 순간에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여 현혹되지만,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고 재산들을 다 빼앗기고 가정 파탄을 일으키고 결국 그 집단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종말을 고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악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믿는 사람의 삶에 대하여 베드로전서는 종, 하인의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살았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라고 베드로는 믿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고난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살았다.
베드로전서 2:19~25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 53:9
23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24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25 전에는 여러분은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내용은 칭의와 성화와 영화다. 여러분은 이미 칭의의 삶을 살고 있다. 칭의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의인으로 인정받음, 용서받음이다.
칭의된 믿는 사람은 믿음의 결과로 중생과 회개를 통하여 성화를 이루어간다. 칭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칭의 곧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고 그 구원받은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화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성스럽게 되어감이다. 성화를 위한 회개는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 서는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과 의도를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생기는 전향이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을 입는 것으로 내면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으로 평생 이루는 것이다. 죄에 대한 죽음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 속에서 계속된 회개를 하지만 아직도 연약(죄-무기력, 악을 발견하게 함)한 가운데 있다. 끊임없이 거룩해져 가는 것이 성화다. 한번의 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번의 회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연약함을 핑계로 죄를 핑계로 성화를 그르칠 수는 없다. 성화의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 부정을 하지 않으면 인간 본성에 따라 살게 된다. 그래서 자만하게 된다. 자기 왕국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자기 부족과 허물을 돌아보며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내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부정과 섬김의 하인 종 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인간의 본능은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야심과 탐욕으로 성공만을 목표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참고 견디며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고난의 길, 재난과 질병과 전쟁의 고통,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삶을 견뎌야 한다. 재난에도 주님께 감사하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비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를 달게 받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고통을 감사와 기쁨으로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고난은 현세의 삶인 탐욕, 야심, 정욕에 의한 것이다. 고난은 지상의 행복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리게 한다. 고난과 고통인 십자가의 삶은 현세의 삶이 허무한 것임을 깨우쳐 주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소망하게 한다. 현세에 만족하거나 집착하면 소망이 없다. 현세에서 끝난다. 하나의 예표일 뿐 지나가는 것인 이 세상 삶에 대한 부귀영화를 꿈꾸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소망해야 한다. 현세의 삶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고 이겨내야 한다는 말이며, 영원한 세상을 사모하라는 말이다. 물론 현세도 영원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라. 그것은 바로 자기 부정과 십자가를 지는 삶이며 소망을 갖는 삶을 말한다. 현세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니 감사하게 살라. 지나친 금욕이나 방종은 금물이라는 말이다. 현세를 버리거나 집착하는 것은 잘못이다. 절제하며 인내하며 청지기 소명의 삶을 살자. 내 아내, 내 자식, 내 주변의 이웃이 우리들의 십자가다.
그러면 재림 때 이루어지고 구원의 완성이며 영광스럽게 되는 영화의 삶이 주어질 것이다. 바로 이러한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삶을 사는 것이 믿음 생활이다. 칭의 성화 영화는 순서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같이 동시에 이우러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생명을 얻고 현세에 집착하지 않으며 현세를 목표로 살지 않고 다만 현세를 감사하며 살고 현세의 고난을 이겨내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중생한 믿는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를 하며 성화되어 영화되는 삶을 영생하는 삶을 살자. 그 모든 것을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서두에서 설교한 말씀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사는 사람들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23편의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시편23편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내게 고난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성공과 부의 축적만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우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세의 있는 그대로의 고난, 죄의식을 가지고 이겨내며 오히려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