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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주일낮예배 제목 : 문제 있는 인생 이해 성경 : 창세기 32:22~31, 시편 17:1~7, 15, 로마서 9:1~5, 마태복음 14:13~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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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주일낮예배 제목 : 문제 있는 인생 이해 성경 : 창세기 32:22~31, 시편 17:1~7, 15, 로마서 9:1~5, 마태복음 14:13~21

필명 이일기 2018. 12. 1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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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주일낮예배

제목 : 문제 있는 인생 이해

성경 : 창세기 32:22~31, 시편 17:1~7, 15, 로마서 9:1~5, 마태복음 14:13~21

 

살다보면 무심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관한 것이다.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골반이 틀어진 경우 오른쪽으로냐 왼쪽으로냐 이해하는데 쉽지 않다.

병원에 가면 골반이 틀어졌는지 엑스레이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을 보면 오른쪽으로 틀어져있다. 그러면 의사는 오른쪽으로 틀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 의사의 말에 따라 오른쪽으로 틀어져있으니 바로 잡기 위해 반대방향인 왼쪽으로 몸을 비트는 접골운동을 하면 오른쪽으로 더 틀어진다. 왜냐하면 의사가 환자의 입장에서 설명해주어야 하는데 엑스레이상으로 나온 것 본 것 그대로 말했기 때문이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잘못 받아들 수 있다. 환자편에서 왼쪽으로 틀어져 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의학적으로 말하니 어려운가? 그렇다면 길안내에 적용해서 말해보자. 어떤 사람이 차를 타고 가다가 사거리에서 특정지역으로 가려한다고 하면서 길을 묻는다. 우회전해야 하는가? 좌회전해야 하는가? 라고 물으면 마주보고 있는 내 입장에서 내 쪽에서는 오른쪽이지만 묻는 사람 쪽에서는 좌회전이니 묻는 사람입장에서 말해주어야 한다.

인생은 이와 같이 내 입장이 있고 상대방의 입장이 있어서 각각 자기 입장에서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상대방과의 관계에서는 상대방 입장에서인지 내 입장에서인지 분명하게 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지만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 의하여 내 인생이 결정되어진다는 사실도 깨우쳐야 한다. 인생은 혼자만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 하나님은 우리편에서 말씀하신다. 우리편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편에 섯다는 것은 우리를 이해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를 이해한다는 말은 우리의 잘못을 이해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창세기 32:22~31

22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23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보내고 난 다음에,

24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천사, 구체적인 낯모르는 인간, 하나님)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논쟁, 싸움, 다툼, 시름)을 하였다.

25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26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능력이나 주장 인정, 복을 줌)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27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28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3)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겨루다' 또는 '하나님이 겨루시다'

29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30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4)브니엘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얼굴'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야곱은 에서를 속이고 도망 나와 14년 이상 살았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가 아직도 분노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바로 가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계략을 세워 그의 식솔들과 재산들을 먼저 에서가 살고 있는 자신의 고향으로 보낸다. 꾀가 많은 욕심장이 야곱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아직도 야곱은 에서가 자신을 받아줄 마음자세가 되어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을 먼저 보내어 에서의 마음이 변화가 있기를 고대하는 한편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을 하며 홀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홀로 남아있는 가운데 야곱은 거룩한(, 문제가 없는) 하나님을 대면하고 씨름하다(왜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래서 고생하며 살도록 했습니까? 자신이 욕심이 많은 것 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지 않느냐? 하며 자신에 대한 평생의 본질적인 성격을 말하며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자신을 말하는 것처럼 논쟁하여 부모나 하나님은 그러한 모든 것을 자신이 낳은 자식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자기 탓하며 사랑으로 포용하며 인내하는 자식 못 이긴다. 하나님은 사람을 못 이긴다.) 이기고 다만 엉덩이뼈만 다쳐 절뚝거린다. 절뚝거렸다는 것은 야곱에게 아직도 문제가 남아있다고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함을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점을 타고난 명운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야곱의 명운을 보다 큰 뜻에서 바라보며 야곱을 대면하여 죄,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인정(축복)해주신다. 그러니까 창세기 본문은 인간의 (불행이나 행운이라 할지라도)인생과 하나님의 섭리와 축복의 관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각각이 불행이나 행운이 있고 절망이나 희망이 있는 것 이상의 뜻을 품고 섭리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못난 문제가 있는 우리의 모습에도 하나님이기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 이 사실을 믿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믿으라. 물론 싸가지 없는 자식은 버려지는 것과 같이 불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심판받는다.

 

시편 17:1~7, 15

1 주님, 나의 진실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거짓 없이 드리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2 주님, 친히 "너는 죄가 없다"고 판결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공평하게 살펴보아 주십시오.

3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시험하여 보시고, 밤새도록 심문하시며 샅샅이 캐어 보셨지만 내 잘못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무슨 잘못을 발견하셨습니까?

4 남들이야 어떠했든지, 나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랐기에, 약탈하는 무리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5 내 발걸음이 주님의 발자취만을 따랐기에, 그 길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습니다.

6 하나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귀 기울이셔서, 내가 아뢰는 말을 들어 주십시오.

7 주님의 미쁘심을 크게 드러내 주십시오. 주님께로 피하는 사람을 오른손으로 구원하여 주시는 주님, 나를 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15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주님만을 따르며 잘못하지 않은 자신을 변호해주고 거짓 없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주며 자신을 치는 자에게서 구원하여주고 떳떳이 하나님을 뵈며 함께 있게 되어 기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당당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다.

자신을 치는 상대와의 관계에서 양심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표현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구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교만한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서는 시편기자를 우리는 볼 수 있다.

물론 인간이 야곱과 같이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나 그러나 한편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곧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진정 하나님의 섭리의 입장에서는 이유를 댈 수 없다. 그런 하나님 앞에 이유 댈 것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어여삐 여기신다.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다. 부모가 자식을 이길 수 없다.

비록 문제가 많은 우리 자신이지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더구나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 일이며 놀라운 일인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감탄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란다.

 

로마서 9:1~5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3 나는, 육신으로 1)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 '내 형제들'

4 2)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5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바울이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언약이 있으며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으며 약속이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예수도 그들로부터 나왔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야곱처럼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며 인간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인간의 잘못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언약이 있고 예배가 있고 기도가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본질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랑은 모든 잘못을 덮는다. 사랑은 사람을 구원한다. 사랑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함을 준다. 문제 많은 인간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고 역사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인생이 구원받는 줄을 믿으시길 바란다.

 

마태복음 14:13~21

13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이 소문이 퍼지니, 무리가 여러 동네에서 몰려 나와서, 걸어서 예수를 따라왔다.

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17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18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19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20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게 해 주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인간의 모습을 볼 찐대 어찌 밉지 않고 볼성 사납지 않겠는가! 수천 명 속에 어찌 완벽한 인간들만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셨다. 우리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먹고 산다. 그때 비로소 문제 많은 인간이지만 용서받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복음에 의하여 용서받고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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