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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6주일낮예배 제목 : 결실 성경 : 신명기 34:1~12, 시편 90:1~6, 13~17, 데살로니가전서 2:1~8, 마태복음 22:34~4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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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6주일낮예배 제목 : 결실 성경 : 신명기 34:1~12, 시편 90:1~6, 13~17, 데살로니가전서 2:1~8, 마태복음 22:34~46

필명 이일기 2018. 12. 1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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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6주일낮예배

제목 : 결실

성경 : 신명기 34:1~12, 시편 90:1~6, 13~17, 데살로니가전서 2:1~8, 마태복음 22:34~46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가진 것도 다 의미가 없다. 재산은 자녀들에게 상속되거나 사회에 반납된다. 지식과 경험도 사라진다. 인간관계도 끝이 난다. 다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관계된, 아는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부분이 그나마 남아있는 것인데, 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이미지들이다. 그렇다면 그 이미지는 그 사람들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인데, 그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된 그 사람에 관한 지식이다. 만약 채무관계에 있었다면 채무관계는 사라지고 오직 관계하던 때의 기억만 남아있어서 그 사람이 어떠했다고 말하게 되고 그것은 그 개인의 역사, 인생에서 만남으로 인하여 소문이나 그 사람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남아있는 것이다. 가족관계, 친구관계, 친인척관계 등등 관계 속에서 그 사람과 만나거나 교제하거나 맺은 관계에서 얻어진 지식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이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라 그 흔적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래서 죽은 후 그 관계된 사람은 가끔씩 특정한 시기와 공간에서 추억하거나 기억하게 된다. 좋은 이미지 관계면 좋은 기억과 추억이 되살아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기억과 추억이 재현될 것이다. 때문에 죽음으로 인하여 그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살았는지 판단되기에 우리는 현재 살아있는 지금 인간관계를 좋은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결국은 그 사람의 결실들이다. 좋은 결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결실도 있어서 그것들이 남아 있게 된다. 좋은 결실을 맺어 현재뿐만이 아니라 죽음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는 여러분 되기를 바란다. 잊혀지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살지 않고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는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대부분의 부모는 그 부모가 죽은 후 자녀들이 기억하는데 자녀들도 나름 부모에 대한 이미지에 따라 기억하거나 보고 싶은 부모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부모도 있다.

신명기 본문은 모세의 죽음과 그의 인생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모세는 좋은 기억과 평가를 받았다.

신명기 34:1~12

1 모세가 모압 평원, 여리고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에 오르니, 주님께서는 그에게, 단까지 이르는 길르앗 지방 온 땅을 보여 주셨다.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 온 유다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에서 소알까지 평지를 보여 주셨다.

4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다. 내가 너에게 이 땅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네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5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서,

6 모압 땅 벳브올 맞은쪽에 있는 골짜기에 묻혔는데, 오늘날까지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7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

8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원에서 모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이 끝날 때까지, 모세를 생각하며 삼십 일 동안 애곡하였다.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잘 듣고 그를 따랐다.

10 그 뒤에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모세와 말씀하셨다.

11 주님께서는 그를 이집트의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보내셔서, 놀라운 기적과 기이한 일을 하게 하셨다.

12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모세가 한 것처럼, 큰 권능을 보이면서 놀라운 일을 한 사람은 다시 없다.

 

신명기 본문은 모세의 죽음과 그에 대한 평가이다. 모세는 120살에 모압 땅에서 죽어 30일간 애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백성들이 모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에 관한 표현이다. 모세가 안수한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지혜의 영이 넘쳤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 말을 잘 듣고 잘 따랐다고 했다. 후계자까지 좋은 평가를 한 것이다. 모세 이후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기적과 기이한 일을 하셨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큰 권능을 행한 사람은 모세가 유일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모세를 택하여 섭리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는 말이다.

사람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 그의 진가나 평가를 받는다. 죽은 사람이 기억되는 것은 그 사람의 살아생전의 업적에 의한다. 자기 자녀가 돌아가신 부모를 추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인생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섭리하신 결과에 따른 것이다.

 

시편 90:1~17

1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2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3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4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5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

6 풀은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7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사라지고,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8 주님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들추어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9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11 주님의 분노의 위력을 누가 알 수 있겠으며, 주님의 진노의 위세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12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13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

16 주님의 종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 주시고, 그 자손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십시오.

17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본문 시편은 하나님은 만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시고 만물의 주인이다고 하고, 하나님은 인생의 사는 날 수는 정해놓았다고 말하고, 하나님은 인생이 사는 날 동안 은총을 베풀어 결실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생의 결실을 주신다는 말이다.

데살로니가전서 2:1~8

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2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3 우리의 권면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4 우리는 하나님께 검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5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6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7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거짓 없이 진실하게 전하고,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한 적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전했다고 말한다. 사람을 위해 아첨이나 탐욕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권위적이지 않고 유순하게 복음을 나누어 주며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 복음으로 사랑을 했다는 말슴이다.

마태복음 22:34~46

34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다.

35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36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40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41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42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43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말하기를,

44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46 그러자 아무도 예수께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으며, 그 날부터는 그에게 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다.

 

마태복음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파인의 특징을 이해해 보자. 바리새인은 유대교 경건주의자들이었다. 로마의 지배를 받을 당시 성전 중심의 유대교는 성전 파괴 이후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교 명맥을 이어오다가 기독교의 등장을 시기하여 유대교 회당에서 기독교를 내쫓았다. 그 중심에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현세적인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영혼, 부활을 믿으며 경건에 힘쓰고, 로마의 헬레니즘 문화, 곧 이방문화를 배제 배타 하며 유대교 율법을 고수하였다. 그리하여 율법의 형식주의에 매몰되었다. 사두개인들과 갈등하고 기독교를 핍박한 사람들로 열심당과 같은 유대교와 정치를 혼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로마 지배 이후도 존속하여 전 세계로 흩어져 유대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니까 본문 34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말문을 막았다는 소문을 듣고 모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영혼과 부활에 대하여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모인 것을 말한다. 35절 이하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은 그들이 중요시 한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나 그 율법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문장은 무엇이냐고 물어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답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신들의 율법 중시하지만 그것을 실천하기보다 그 율법 자체를 귀중히만 여기고 그러한 것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율법을 가장 잘 알고 그것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며 교만하여 권위적이고 형식화된, 곧 율법의 의미와 참 뜻과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관심도 없고 오직 율법 그 자체에만 관심을 갖는 바리새인들에게 과연 바리새인들이 귀중히 여기는 율법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다윗을 예로 들어 율법에서 곧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인지 묻고 그들의 대답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했으니 그들의 대답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며 그들의 율법주의적 관심에 일격을 가한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의미와 그 뜻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지 우리가 율법을 가졌네 하는 잘난척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본문에서 바울이 실천한 사랑은 바로 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행한 것이다. 기독교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인 이웃을 사랑하는 종교다. 사랑은 결국 자기희생이다. 자기희생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상징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며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 같이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믿으면서 교회 다니네, 하나님 믿네 하는 것은 형식적이요 율법적인 삶이다. 진정 하나님을 믿고 교회 다닌다면 그 마음에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섭리하셔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죽는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생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 길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온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시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아니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윤리도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우리 마음의 사랑을 말함이다. 이 가을에 우리 마음의 성찰을 통하여 우리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고 결실하는 여러분 되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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