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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0주일낮예배 제목 : 예수님의 자기 비움(케노시스) 성경 : 빌립보서 2장 1-5절 주제 : 남을 위하라 본문
20151220주일낮예배
제목 : 예수님의 자기 비움(케노시스)
성경 : 빌립보서 2장 1-5절
주제 : 남을 위하라
구조
오늘 성탄주일예배를 드린다. 성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는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으신 성육신 인카네이션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자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다. 성탄주일예배는 그러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예배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는데 그 세상은 어떤 원리에 의하여 조성되어 있는가? 자연과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홀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존재하게 되어있다. 한마디로 막스 베버가 말한대로 다른 존재와 더불어 남을 위해 존재하게 되어있다. 자연의 생물과 무생물, 생물에는 동물과 식물, 그것들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마다 여러 개로 서로 함께 존재하여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은 여러 종족마다 여러 명이 존재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은 부모를 위해, 친구는 친구를 위해, 선생님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건설업자는 건축주를 위해,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목사는 교우들을 위해 사는 것이다. 남을 위해 사는 구조로 조성되어 있다. 결국 내가 아닌 남인,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구조가 세상 구조다. 타인인 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자신을 위해 남이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고 소멸시킨다. 악마에 의한 지배를 받는 것이다. 악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방해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한다. 남을 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고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은 남의 존재를 죽이는 것이다.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이다. 죄 짖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하여 곧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십자가 사건과 같은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십자가에서 찾았다. 바울은 본래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음을 믿고 있었다. 예수는 구약 성경의 해석인 율법에서 말하는 메시아이고 그를 통하여 율법이 완성됨을 깨우쳤다. 율법은 도덕 행위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만약 율법이 인간 자신의 욕망을 위한 행위의 도덕법이라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빌립보서를 살펴보자. 바울은 실라, 누가, 디모데 등과 함께 제2차 선교여행 중 아시아에서 선교를 막아 다른 곳으로 선교하도록 하는 계시를 받고 드로아를 거쳐 48-50년경 마케도니아의 빌립보에 이르러 유럽 최초 선교를 하게 된다. 그런데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빌립보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회당이 없어서 루디아라는 옷감 장사를 만나 그녀의 집에 기거하며 선교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곳에서 귀신들린, 점성술 하는? 여종을 고쳐주어 주인에게 돈벌이를 못하게 하는 것으로 주인에 의하여, 그리고 복음으로 인하여 고발되어 잠시 감옥 생활을 하다가 천사에 의하여 옥문이 열려 출옥하는데, 문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결하려던 간수와 그 가족을 전도하기도 한다. 5년여 뒤 3개월 정도의 제3차 선교여행 중 빌립보교회를 다시 방문한다. 빌립보교회에는 유오디아, 순두게, 클레멘트 등 상당 수 여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유오디아, 순두게 두 여성 지도자 사이의 전도하는 일과 봉사하는 일 등으로 인한 갈등이 있었고, 유대주의자들이 잠시 방문하여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자기 과시, 자기 주장, 자기 자랑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분란과 괴로움이 발생하고 공동체 세상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것이다. 한편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에배소, 로마, 가이사랴, 빌립보 중 에베소일 가능성을 학자들이 주장 하나 전통적으로는 로마) 에바브라디도를 파송하여 후원할 정도로 바울과 빌립보교회는 긴밀하고 애정이 있는 관계였다. 빌립보교회가 바울을 후원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남을 위하였다는 말이다. 바울을 사랑했다는 말이다. 바울에게 주었다는 말이다. 남을 위한 일에(사람들을 구원하는 일) 남을(바울을) 도왔단 말이다. 그래서 친밀하고 애정있는 관계가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믿음생활은 바로 남을 사랑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에바브라디도가 바울에게 올 때 병을 얻어 빌립보교회와 바울은 걱정하기도 하였으나 돌아갈 때는 문제없이 빌립보서편지(최소 3개의 편지들이 편집)를 63년경 빌립보교회에 전달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후원과 친밀한 관계로 인하여 기쁜 마음으로 교우들 간에 하나 되기를 촉구한다. 2장 말씀을 보자. 하나님과 본질상 하나였지만 낮아져 죽기까지 하신 그리스도의 겸손, 자기 부인과 비움(케노시스), 결국 부활하여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처럼,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 되기를 촉구한 것이다. 또한 유대주의자들을 경계하며,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는 자신과 같이 빌립보 교우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실천적 삶을 살도록 권면한 것이다. 비록 감옥 생활을 하고 있어서 고난 가운데 있지만 황제 집안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식 등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부르신 상 받을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과 같이 복음을 전하고 만족하며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하고,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것과 같이,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빌립보 교우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으로 필요한 모두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인간 자아에 사람들은 관심을 쏟는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한다. 까르페 디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관심과 욕망은 자기 과시와 자기 자랑, 자기 목숨을 유지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고통과 불행을 가져온다. 세상을 파괴하고 소멸시킨다. 예수님은 자아의 욕망을 위한 인간의 하나님 부인하는 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자기를 부인한 것이다. 예수 안에서 자기 부인의 낮아짐으로 인하여 남을 살리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살자. 하나님을 믿자. 주님 오심을 기념하는 오늘 주일예배를 통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남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