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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주일낮예배 제목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성경 : 사도행전 7장 51-53절 주제 : 역사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문제(죄)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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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주일낮예배 제목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성경 : 사도행전 7장 51-53절 주제 : 역사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문제(죄)를

필명 이일기 2018. 12. 13.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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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주일낮예배

제목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성경 : 사도행전 751-53

주제 : 역사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문제()를 해결(구원)받자.

구조

 

1. 불신자 중에는 자신은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보고 비판하며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신자들의 도덕성 때문이라고 핑계 댄다. 신자들 땜에 예수 안 믿는다거나 교회 안 다닌다거나 예수 안 믿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오히려 그 누구 때문에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누구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말하는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며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이 세상에 보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교회 다니는 거다.

 

만약 그 누구 때문에 예수 안 믿겠다면 불신자로 남겠다거나 아니면 다른 종교를 믿겠다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불신자로 사는 것은 세상을 모르고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배후에 계시며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다른 종교를 믿는 다는 것도 기독교의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다른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잘못된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다.

본래 신앙은 신을 믿는 행위다. 기독교는 신을 믿는 종교다. 하지만 다른 종교는 인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인간의 가르침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은 신을 믿는다는 점에 어긋난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다른 종교의 창시자와 다르다. 대부분의 다른 종교의 창시자는 인간이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신이다.

 

지난 5월에 방한하여 곳곳에서 강연을 한 라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C. S. 루이스 이후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옹호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세계의 종교를 연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주요 종교의 창시자들 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조로아스터교 신자는 조로아스터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조로아스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불교 신자들은 부처의 사성제, 곧 부처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이 사는 방법에 관한 배움을 얻는다.

 

사성제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로 사제(四諦)라고도 함. (((()의 네 가지 진리로 구성되어 있다. 석가모니의 성도(成道) 후 자기 자신의 자내증(自內證)을 고찰하여 설한 것이 십이인연(十二因緣)이라면, 사제설은 이 인연설을 알기 쉽게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 체계를 세운 법문이다. 십이연기설이 이론적인 것임에 대해 사제설은 이론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것이며, 오히려 실천을 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성도 후 좌선사유(坐禪思惟)에 의해 스스로의 깨침을 즐겼으나, 인연의 이치가 매우 어려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설법 방법을 연구하여 사제설을 고안하였다. 그가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比丘)를 상대로 처음 설법한 것이 사제의 가르침이다. 사제의 첫째는 고제(苦諦)이다. 고제는 불완전하고 더러움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 고()는 구체적으로 생···(生老病死)4()와 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온성고(五蘊盛苦)의 네 가지를 합한 8고로 하고 있다. 이 중 애별리고와 원증회고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거나 사별하는 것, 그리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산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고뇌의 원인이 된다. 특히 자기 중심적인 애증(愛憎)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뇌는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구부득고는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앞의 것과 같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생기는 고통들이다. 오온성고는 앞의 일곱 가지를 개괄한 것으로, 오온(五蘊 : 一切法)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집착을 가진다면 모든 것이 고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 둘째는 집제(集諦)이다. 집이란 집기(集起), 즉 사물이 모여 일어나기 위한 원인이므로 고의 원인이나 이유라는 뜻이 된다. 고의 원인으로서 도처에서 열락(悅樂)을 추구하여 그치지 않는 갈애(渴愛)’를 뜻하는데, 십이연기설에서는 무명(無明)과 갈애를 고뇌의 원인으로 함께 보고 있다. 그러나 갈애는 무명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그 속에 무명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갈애는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갈애는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의 삼애(三愛)가 있다. 욕애는 감각적 욕구인 오욕(五欲)에 대한 갈애로서, 현실에 있어서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애욕을 말한다. 유애는 존재를 뜻하는 유()에 대한 갈애로서, 사후에 천국 등의 훌륭한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이다. 이것도 자기 중심적인 욕구이며, 천국 등도 윤회계(輪廻界)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무유애의 무유는 비존재, 즉 허무를 말한다. 어떠한 존재도 절대 확실한 안온세계(安穩世界)가 아니기 때문에 꿈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계(虛無界)를 안주(安住)의 땅으로 삼는 것을 무유애라 하는데, 무유애 또한 자기 중심적인 것이므로 이상으로 삼는 것을 금하고 있다. 무아(無我)나 현세적 입장에서 볼 때 이 갈애는 번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고통의 원인을 탐((()의 삼독(三毒)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많다. 자기에게 맞으므로 탐욕을 일으키고, 맞지 않기 때문에 분노하며, 그것이 다시 갖가지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셋째는 멸제(滅諦)이다. 멸제는 깨달음의 목표, 곧 이상향인 열반(涅槃)의 세계를 가리킨다. 즉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해탈을 얻음을 말한다. 넷째는 도제(道諦)이다. 도는 이상향인 열반에 도달하는 원인으로서의 수행방법이며,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라는 여덟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팔정도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지며正念,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正定수행법이다. 이는 또 유()에도 무()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수행법으로서 원시불교의 근본교의를 이루고 있다. 사제 중의 고는 생사과(生死果)이고, 집은 생사인(生死因)이며, 멸은 열반과(涅槃果)이다. 이는 다시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열기(還滅緣起)의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두 가지는 생사유전의 고통과 그 원인을 말하고 멸과 도의 두 가지는 유전을 벗어나 무고안온(無故安穩)의 열반과에 도달할 수 있는 환멸의 수행법을 말한다. 이를 도식화하면 그림과 같다. 그러나 후기의 학자들은 성문(聲聞)이 고집하는 사제의 견해를 파()하기 위하여 일체의 제법(諸法)이 공적(空寂)하다는 입장에서 볼 때는 고···도가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집착을 깨뜨려서 사제의 진의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선가(禪家)에서는 사제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고제는 한 생각 물든 마음이 생기는 것을 뜻하고, 집제는 그 생각이 거듭 이어지는 것을 뜻하며,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멸제라 하고, 멸이 멸하지 않음을 철저히 아는 것을 도제라고 하였다. 즉 사제를 모두 한 생각에 둔 것이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이슬람 신자들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코란이 그들에게 감동을 준다. 조로아스터나 부처 마호메트가 세상을 만든 것도 아니고 그 신자들이 그들에게 의존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 그 자체였으며, 자신의 최우선 과제가 죄를 사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신자는 예수에 의존한다. 이러한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요약하면 다른 종교는 그 창시자가 모두 인간이지만 기독교의 창시자는 신이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주장이다. 예수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며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죄를 사할 권한을 갖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러한 권한을 말한 종교 지도자는 없다. 신이 아니고는 인간으로서는 이런 말을 한다거나 주장할 수 없다고 재커라이어스는 말한 것이다.

 

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단순히 다른 종교의 창시자와 다른 신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잘못과 문제와 한계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다. 부처가 네 죄를 용서한다고 말하는가? 공자가 네 죄를 사한다고 말하는가? 예수만이 하나님 만이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신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요 그 죄 사함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삐쳐서 삐뚤어진 인간을 참으시며 자기 맘대로 자유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만족을,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세상에 죄악을 낳는 인간을 단죄하시되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그 믿음을 위하여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한다.

부처 공자 마호메트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올바로 살도록 가르친다. 인간적 입장에서 결과적으로 인생을 잘 살게 하는 데는 같은 것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지만 그 영적 차원은 엄청난 차이다.

 

3. 본문

30 사십 년이 지난 뒤에, 천사가 시내 산 광야에서 가시나무 떨기 불길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31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가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32 '나는 네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두려워서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3:6

33 그 때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신발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3:5; 7; 8; 10

34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학대받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다. 이제 내가 너를 이집트로 보내니, 너는 가거라.'

35 이 모세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하고 배척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모세를 가시나무 떨기 속에 나타난 천사의 능한 손길을 붙여 지도자와 해방자로 세워서 그들에게로 보내셨습니다.

36 이 사람이 이집트 땅과 홍해에서 놀라운 일과 표징을 행하여 그들을 이끌어냈으며,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도 그러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37 '하나님께서는 나를 세우신 것과 같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한 사람이 바로 이 모세입니다. 18:15'

38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회중으로 모여 있을 때에, 시내 산에서 그에게 말하는 천사와 우리 조상들 사이에 중개자가 되어서, 산 말씀을 받아서 우리에게 전해 준 사람입니다.

39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를 제쳐놓고서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하였습니다.

40 그래서 그들은 아론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십시오. 이집트 땅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온 그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32:1

41 그 때에 그들은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그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두고 즐거워하였습니다.

4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그들을 내버려 두셔서, 하늘의 별들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책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가문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에, 희생물과 제물을 내게 바친 일이 있었느냐?5:25-27(칠십인역)

43 너희는 몰렉 신의 장막과 레판 신의 별을 받들었다. 그것들은 너희가 경배하려고 만든 형상들이 아니더냐?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바빌론 저쪽으로 옮겨 버리겠다.‘

44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 살 때에, 그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지시하신 대로 만든 것인데, 모세가 본 모형을 따라 만들었습니다.

45 우리 조상들은 이 장막을 물려받아서,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들의 땅을 차지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그것을 그 땅에 가지고 들어왔고, 다윗 시대까지 물려주었습니다.

46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므로, 야곱의 집안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처를 마련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47 그러나 야곱의 집안을 위하여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48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말하기를

49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66:1; 2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한 것과 같습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52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53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은 스데반의 설교 가운데 모세와 관련된 부분이고 30절 이하는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다. 스데반은 당시 자신을 신성 모독한다고 몰아붙이고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중요시 하는 율법을 받았고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으며 예언자였던 모세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거역한 조상들과 같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성령을 거역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 않는 그들이 의인인 예수를 죽였다는 말이다.

스데반에 의하면, 사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땅을 약속하고 사람들의 반역에도 모세와 여호수아 등을 통하여 그 약속을 지켰다. 그것이 구약 창세기에서 다윗까지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다윗 이후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나라가 부분적으로 멸망당하고 바벨론으로 쫓겨났으며 다시 회복되었지만 결국 로마에 의하여 멸망당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고자 하였지만 조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였다는 것이 구약의 역사라는 말이다. 신약이 시작되는 예수님의 역사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들처럼 또 하나님을 거역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 스데반의 답변이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답변은 구약 창세기 12장부터 아니 창세기 처음부터 말라기까지의 구약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모습을 요약한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고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여차하면 의심 품고 핑계대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냐며 반항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하여 예수를 보내 주신 것이다.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우리 문제를 해결해주시고자 하신다. 바울은 그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다고 체험하고 설파하고 순교했다.

 

4.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쓴 책, “신을 찾아서-어느 무신론자의 진리를 향한 여정에서, 무신론자인 저자는 무신론적 배경을 가진 자신의 집안에서 무신론적 삶을 살았지만, 철저하게 무너지는 난잡하고 자기애적 가정을 그리고 자신의 해리적 특성과 말년에 대 자연에서 느끼는 우주론적이고 이신론이나 자연신론 범신론 등 철학자들의 하나님은 존재할 것이라는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듯이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러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믿음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한다.

5. 하나님은 우리 인생과 함께 하시고자 하신다.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며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의 터진 상처를 싸매주신다. 그러한 분이시니까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팔짱끼고 계시지 않는다. 진실한 신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와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잘 못 느끼고 우리의 욕망에 의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의 소망이 되신다. 하나님을 믿으면 삶이 행복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삶이 따분하고 절망적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는 여러분, 주님의 기도를 드리는 여러분, 하나님께 예배하는 여러분 되셔서 여러분의 삶이 따분하고 지루하지 않으며 절망스럽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소망이 넘치기를, 의미 있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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