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블로그

신약 성경 저작 시기에 따른 기독교 형성 과정 본문

성경

신약 성경 저작 시기에 따른 기독교 형성 과정

필명 이일기 2016. 1. 28. 16:56
반응형


신약성경은 4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서, 유다서,요한서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저작 연대기 순이 아니다. 물론 연대기 성경은 이미 나와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 활동과 교훈 기록인 신약성경 각 권들을 써지기 시작할 때부터 수집되고 성경으로 형성 공인되어 정경화 되기까지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면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유용할 것이다.


예를들면, 써진 시기에 따라, 데살로니가전서(51년), 빌립보서, 빌레몬서(54-55년), 갈라디아서(55-58년?), 고린도전,후서(56년), 로마서(57년), 에배소서(54-56년, 60-62년, 62-64년, 70-95년?), 베드로전서(61-63년?, 75-90년?), 마가복음(70년경), 마태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80년경), 골로새서(62년?, 90년?), 히브리서(85-90년?), 요한복음(90년경), 요한계시록(95-100년경), 데살로니가후서(80-110년?), 야고보서(65-85년, 80-100년?), 요한1,2,3서(100-110년경),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유다서(100-140년경), 베드로후서(150년경?)

 

****************************************************************************************************************

<참고>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정체(正體)

- 박창환(전 장신대 교수, 신약학) 

 

<신약 성경 원본 기록과 그 보존 과정>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은 여러 사람의 글이 모인 것으로, 그 여러 글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 저자들은 각기 교양과 신앙 경력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영감을 통하여 각기 성경을 쓸 때, 특정 장소와 시간에,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종이(파피루스 PAPYRUS)와 붓과 잉크를 가지고 썼다.

그들이 글을 쓸 때, 그 글이 성경의 일부분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며, 또 그들이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며, 종이나 붓이나 잉크는 값이 비싸고 귀한 것이어서, 특별한 각오와 결심이 없이는 글을 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즉 더 비싼 가죽 종이(皮紙 PARCHMENT, VELLUM)를 용지로 사용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또 그렇게 영구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만큼 귀중한 글을 쓴다는 의식도 없었기에, 그 당시 보통 얻을 수 있는 용지인 파피루스(PAPYRUS =PAPER)를 사용했던 것이다.

파피루스라는 종이는 애굽 나일 강 가나 습지(濕地)에서 많이 자라는 파피루스라는 식물(植物)의 내피를, 펴서, 가로 한 겹 세로 한 겹 놓고, 눌러서 말린 것으로, 그 지대의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흔히 사용하던 필기 용지였다. 긴 글을 쓸 때에는 보통 일 척(一 尺) 평방 가량의 것을 몇 개라도 이어서 긴 두루마리를 만들어, 거기에 쓰고, 그것을 두루마리로 말아서 수신인(受信人)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코이네(KOINE=ΚΟΙΝ?) 헬라어라는 평범하고도 통속적인 사람의 말로 기록된 동시에, 그 시대의 가장 평범한 필기 용지인 파피루스라는 종이에 기록됐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파피루스는 이른바 초지(草紙)여서, 그리고 한국이 자랑하는 한지(韓紙)와 같이 견고하고 지구성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쉽게 끊어지고 꺽어지고 부스러지기가 쉬웠다.

가령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를 써서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냈을 때의 일을 상상해 보자. 그 편지는 매 주일마다, 아니 매일 그 교회 회원들에게 읽혀졌을 것이고, 따라서 오래지 않아 그 편지는 때가 묻거나, 부러지거나, 끊어지거나 해서, 그것을 새 용지에 옮겨 써야 할 처지가 됐을 것이다. 그것을 옮겨 쓰는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정성을 다해서, 원본과 차이가 없는 것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헬라어 문자가 대문자들만 있었고, 띄어쓰기라는 제도가 없었다. 그리고 활자판이 아니고 손으로 쓰는 것이어서 같은 글자라도 모양이 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옮겨 쓰는 사람이 원본을 100% 그대로 옮겨 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이 연약한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아무 손상도 받지 않고 그 원본이 고스란히 오늘까지 보존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원본을 그대로 보존하시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도 바울의 편지가 왔다는 소문을 들은 빌립보 교회는 데살로니가에 온 바울의 편지를 읽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그 편지를 베껴오도록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소간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단계에서만 보더라도 원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필사본이 다르고, 빌립보 교회가 만든 필사본이 또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신약 성경 27권의 글이 우선은 파피루스에 기록되었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의 필사본이 만들어져야만 했고, 원본들은 얼마 안 가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원본의 대를 잇는 파피루스 필사본들이 점점 많아져서, 각 교회에서 원본 대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신약 성경의 파피루스 필사본들이 신약 성경의 일부분 또는 몇 책이 함께 필사(筆寫)되어(어떤 것은 복음서만, 어떤 것은 바울서신만, 어떤 것은 사도행전만, 어떤 것은 계시록만, 어떤 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같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역시 그 용지의 나약성과 보존 기술의 취약성 때문에, 아깝게도 거의 대부분이 자취를 감추었다.

필사본 중 가장 낡은 것이 2세기 상반기(A.D. 125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위 P52가) 있고, 오늘까지 발견된 98개의) 파피루스 사본들 중에는, 제2세기의 것이 한두 개(P90 ,P98) 더 있고, 나머지는 제3세기로부터 제8세기 어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많은 교회가 이렇게 파피루스 사본을 성경으로 읽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수명이 길지 않기 때문에 계속 필사본이 만들어지면서 낡은 것은 자연히 사라져간 것이다.)

현존하는 90여 개의 신약 성경 파피루스 사본들이 내용에 있어서 꼭 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다소간의 차이와 불일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곧 필사자인 인간들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간의 실수와 때로는 고의적 변개(變改)로 인해서 성경은 초창기부터 원본과는 조금 다른 모양으로(비록 사소한 것이지만)전달되어 온 것이다.

성경의 귀중성을 깨닫는 교회들은 파피루스 사본들의 나약함과 지구성이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지구성이 있고 견고한 가죽 종이로 파피루스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제4세기부터는 가죽으로 된 용지를 사용하여 성경을 필사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파피루스 사본을 사용하는 것보다 몇 배의 지구성과 편리함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문자 사본의 수가 300개나 되니, 그 수효로 보아서도 98개에 불과하는 파피루스 신약 사본보다 훨씬 지구성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문자 사본은 용지의 값이 비싸기 때문에 좀체로 그것을 만들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대문자를 가지고 썼기 때문에 단위 지면에 기재되는 내용이 비교적 적으므로 비경제적이었다. 이것이 지금 남아 있는 대문자 사본의 수가 적은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떤 교회에서는 계속 파피루스 사본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에서는(아마도 분유한 교회) 대문자 가죽 사본을 사용하였다. 결국 두 가지 종류의 사본이 공존하는 시대가 제7세기 내지 제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교회의 수가 점점 늘고, 성경을 필요로 하는 교회나 수도원이나 개인들이 급격히 많아졌기 때문에, 소문자와 필기체가 고안되었고, 가죽 종이를 사용하되, 많은 내용을 빠른 시간에 필사하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그 시대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1450년에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즉 제9세기 이래 15세기 중엽까지, 많은 소문자 사본이 만들어졌고, 특이 교회가 많은 지방에서는 많은 소문자 사본들이 필사되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그 지방이 가지고 있던 사본들이 대거 필사(筆寫)되어, 비슷한 종류의 사본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2,800여 개의 소문자 사본들은 제9세기 이후의 것들로서, 원본으로부터 따진다면 몇 십대 후손인 사본들을 필사한 것들이며, 서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낼 뿐 아니라, 고대 사본들과 비교한다면 많은 변개(變改)가 있음을 볼 수 있다.

 

********************************************************************************************************************************

 

신약 성경이 언제 기록되었는가?

박창진


전통적으로는 기록 시기를 1세기 중반으로 본다. 가장 늦게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는 요한계시록은 9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2)가 그렇게 밝혔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비평학을 따르는 신학계에서 반대하며 복음서의 경우는 2세기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어떤 과학적인 증명을 통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에게 있는 성경 기록물들에서 원본을 확인할 수가 없다. 원본이 없다고 얘기되고 있다. 이 말은 원래 원본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사본의 존재 자체가 원본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원본이 있다고 하더라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과학을 활용하여 기록 시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100% 정확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 근거는 한 가지이다. 1세기의 저작자들(흔히 사도적 교부들이라고 불리는 클레멘스, 이그나티우스, 바나바스, 헤르마스 등)의 글에는 신약 성경의 존재에 대해 언급이 거의 없는 반변에 2세기의 저작자들(클레멘스, 오리겐, 터툴리안 등)의 글에는 그 존재에 대한 언급이 이러한 사실이 1세기에는 신약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절대적인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전혀 아니다. 1세기와 2세기의 저작자들은 상황이 달랐다. 1세기에는 교회 내부의 저작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신약 성경의 존재에 대해 그 안에 별도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2세기의 저작들은 불신자와 이단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적었다. 신약 성경의 내용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마르시온(?-?)이 대표적이다. 그는 구약을 던져 버렸다. 누가복음과 열 개의 바울 서신(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제외)만을 정경으로 생각했다. 그것들 중에서도 자신의 교리와 상충되는 부분들은 삭제하거나 변조하였다. 누가복음의 첫 부분(1-2장)을 누락시켰다. 2세기 중반에 이 일이 일어났다.

1세기의 저작에 신약 성경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시대에는 신약 성경이 절대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대에는 그것을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어느 것인가는 별도의 논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기록되지 않았다는 절대적인 근거로 삼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고 이그나티우스는 아무런 설명 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에 대해 언급한다(에페제[Efeze] 17:1, 비고 마 26:7). 그는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의 지도자들에게 감추어졌는 것을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한다(에페제 19:1, 비고 마 2:8, 12). 그는 계속해서 동방 박사에게 나타났던 별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한다(에페제 19:2-3, 비고 마 2:2, 9-10). 필라델피아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요한복음 3:8의 말씀을 지적한다(7:1). 이와 같은 글쓰기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전승들이 이미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문서들 속에 고정되어 있고 또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공동체 내에서라야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성경을 만들었는가>(야콥 판 브럭헌, 총신대학교출판부), 53쪽.

필라델피아로 보낸 그의 편지에 있는 내용이다(8,2). “어떤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옛 것들(구약)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복음서에 있는 것을 믿지 않겠소.’ 그래서 나는 이 말에 대해 ‘그것은 (그 안에) 적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내게 ‘그것은 아직 문제로 삼아야 할 일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그 옛 것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순결한 옛 것들: 그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분으로 인한 믿음! 그 안에서 나는 당신의 기도로 말미암아 내가 의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유대인들이 복음서의 내용에 대해 거부감을 표출하였다고 한다. 복음서가 그 당시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당연히 불가능하다. <누가 성경을 만들었는가>, 56쪽.

요한계시록은 그 내증에 의하면 주후 70년 전에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이레니우스가 어떤 이유로 90년 대에 기록되었다고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요한계시록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목 베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신원을 요청한다. 자신들의 억울함에 대해 복수해달라는 것이다. 복수의 대상은 순교자를 양산한 세력(음녀 또는 바벨론이라고 지칭)이다.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 곧 하나님께서 부르시고자 하시는 이들을 다 부르신 이후에 복수해 주시겠다고 대답하신다. 그 기간이 지난 후에 복수해주신다. 다시는 그들이 존재하지 못하게 하셨다. 완전한 멸망이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언약의 세계가 펼쳐진다. 여기에서 음녀는 성경 전체에서 일관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만이 아니라 세상 임금을 함께 따르는 경우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 요한계시록의 대가로 알려진 이필찬 교수는 로마라고 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로마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에 음녀라고 이야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음녀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존재는 유대인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배교한 옛 언약의 백성들뿐이다. 유대인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결국 하나님에 의해 멸망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완전히 파기되었던 것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돌 성전 파괴를 통하여.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시점에서는 주후 70년의 그 일이 미래의 일이었다. 곧 일어날 일이었다.

유다서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1:17)는 권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사도들은 맛디아를 포함하면 열 두 사도들(유대인의 사도)이고 바울(이방인의 사도)을 포함하면 열 세 사도들임은 분명하다. 그 편지를 받는 이들은 그들에게 직접 얘기를 들었다. 그들에게 직접 교훈을 받았던 이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이 편지가 전해졌다. 이 또한 이 편지가 1세기에 기록되었다는 반증이다.

바울 서신도 1세기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문제는 복음서이다. 과연 복음서도 그러한가? 앞에 언급한 내용 이외의 유추를 할 수밖에 없다. 누가복음의 전반부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눅 1:1~3)

여기에서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였던 이들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직접 들었던 이들이 들은 내용을 글로 적으려고 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간접적으로 곧 전승을 통하여 들었던 이들이 전승의 내용을 글로 적으려고 했다는 것일까?

전승이라면 최소한 60-70년이 지난 후에 사도들에게 들었던 이들이 후세대에게 전한 내용을 글로 적으려고 했다는 것이 된다. 전승은 많은 면에서 최초 증언자의 증언 내용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많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자신도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고 한다. 전승이라면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피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초 전달자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글은 최초 증언자를 전제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들에게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서 글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행 1:1상)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먼저 쓴 글이란 누가복음임이 분명하다. 사도행전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 이들과 특별한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입은 바울이 증인으로 사역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함께 지내면서 직접 경험하였거나 그들에게 직접 듣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사도행전은 기록 시점이 바울 사도가 로마에서 연금 상태가 된 시점과 연결되어 있으며 누가복음은 그 이전에 기록되었다.

예수님의 행적을 초대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이나 이방인 신자들이 아는 것이 필요하였을까 아니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필요하였다. 사도들이 말로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였기에 글로 기록할 필요는 없었을까? 아니면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기록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2세기에 글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에는 그 시점에서 그러한 글이 필요하였기에 그 글이 기록되었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1세기에도 역시나 그 필요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동일한 필요가 있었다면 1세기 곧 예수님의 행적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사고이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했다(딤후 3:16). 여기에서 ‘모든 성경’은 구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글을 포함하여 그 당대의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되고 있는 신약 성경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모세보다 사역적으로 더 우월한 상태에 있다고 하였다(고후 3:7-10).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 오경이라고 불렀다. 모세의 글이 구약에서 성경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그보다 더 우월한 사역적 지위 가운데 적은 자신의 글은 성경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리가 없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편지가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했다(고전 14:37).

‘하나님의 감동으로’에는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성경에 해당되는 글을 기록하려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기계적으로 머리에 글 내용을 주입하여 기록하게 하신 것은 아니고 기록자가 연구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 내용이 하나님께서 전달하시려는 바를 벗어나지 않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록하려는 마음을 누군가에 주셨다고 할 때에 어느 시점의 사람일까? 사도들이 살아 있어 그들에게 직접 듣고 필요하면 그 내용을 감수받을 수도 있는 1세기의 사람일까? 아니면 그들이 모두 죽고 난 이후에 전승에만 의존하여야 하는 2세기의 사람일까?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에 비해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높다고 한다. 나라도 두 경우라면 1세기의 사람에게 기록하려는 마음을 주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1세기의 사람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셨다고 보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며 상식적이다.

오늘날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대해 교회에 글을 적었다고 하자. 그 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경이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반응하는 것에는 계시의 종결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글, 그래서 교회가 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글은 이미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계시의 종결은 어느 시점에 이루어진 것일까? 사도들, 선지자들, 복음 전도자들의 활동이 끝나는 시점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 당대의 교회에게 전해지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가 부여되던 인물들이 살아 있는 기간에 기록된 글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주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 저명한 신학자인 로빈슨(J. A. T. Robinson)이 <Redating the New Testment>(London, 1976)에서 신약 성경이 모두 주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경은 언약의 책이다. 구약은 옛 언약의 준말이고 신약은 새 언약의 준말이다.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은 성경 자체의 증언이다. 신약 성경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이 공존하는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옛 언약이 공적으로 파기되는 것이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돌 성전 파괴이다.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가 그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돌 성전을 가리키며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 된다고 하시고는 그와 연관된 내용을 이어서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확장하여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언약에 대해 바르고 깊이 있는 이해가 있게 되면 계시의 종결 시점을 주후 70년 이전으로 잡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약 성경이 언제 기록되었는가? 1세기로 잡는 경우와 2세기로 잡는 경우가 있다.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어느 하나가 옳고 다른 하나는 엉터리다. 이제까지의 글을 근거로 나는 2세기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엉터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언약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지경이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상 곧 1세기의 저작에는 거의 복음서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논거를 삼고 있다.

복음서가 1세기에 기록되었는가 아니면 2세기에 기록되었는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결정적인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각자가 스스로 선택할 사안이고 그 선택과 무관하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다. 그렇게 살면 된다. 그런데 가능하면 바른 지식에 입각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2세기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사고 가운데 하나는 지적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통을 따르는 이들에 비해 학문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연구를 하는데 비해 전통을 따르는 이들은 그냥 전통적으로 그렇게 이야기되어 왔기에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 양 생각한다. 되도 않는 우월의식이다.

교회의 전통에는 옳은 부분과 옳지 않은 부분이 공존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옳지 않은 부분임에도 전통이기에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 문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고 매우 심각한 것이다. 동시에 옳은 부분인데도 어떻게든지 흠집을 내고 부정하는 것이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마땅한 신학 자세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옳은 부분은 더 풍성하고 온전하게 하여야 하고 옳지 않은 부분은 정확하게 밝혀 바로잡는 것이 교회가 취하여야 할 바른 자세이다.

 

********************************************************************************************************************************

 

예수님에 관한 성경의 탁월한 역사적 신뢰성
예수아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신약 성경의 기록들은 얼마나 역사적 가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기록에 관한 역사성을 살피기 위해서는 복음적인 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역사가들과 자유주의자들조차도 인정할 수 있는 성경의 일반적인 역사적 기록 연대를 살펴봐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다루는 신약 성경의 기록 연대는 일반 역사가들과 자유주의자들도 인정할 수 있는 지극히 일반적인 잣대를 가지고 성경의 연대를 측정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이 나오는 복음서는 “마가복음”입니다. 이 마가복음서는 언제 기록되었을까요? 마가복음서의 기록 연대를 보통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A.D. 6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A.D. 70년 경을 전후해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이 기록된 연대를 일반적으로 A.D 70년이라고 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A.D. 70년은 예수님의 죽음(A.D. 30년경)후, 약 40년이 지난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예수님에 관한 최초의 기록물이 문자로 완전하게 기록되었습니다.

둘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 연대는 언제일까요? 보통 복음주의 학자들은 A.D. 60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일반 역사가들도 인정할 수 있는 연대는 A.D. 80년경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50년 이내에 기록되었습니다.

셋째, 요한복음은 언제 기록되었을까요? 요한복음의 기록연대를 복음주의자들은 60-80년 경으로 보고 있으나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90년경으로 봅니다. 여기에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모두 인정할 수 있도록 요한복음의 기록연대를 A.D. 90년경으로 보겠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약 60년이 지난 시점에 이미 문자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대부분의 역사가들과 성경학자들이 모두 인정할 수 있는 복음서의 기록연대는 마가복음은 70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80년, 그리고 요한복음은 90년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 복음주의 학자들은 복음서의 기록 연대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쓰였다는데 대한 타당한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자유주의 성경학자들도 인정할 수 있는 기록연대를 좀 더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들을 기록한 문서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입으로 전달되든지 쪽지나 메모 등등의 형태로 유지되다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최소한 30년에서 60년 사이에 이미 완전한 형태의 문서로 기록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30년에서 60년 사이에 복음서 기록이 완성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30년에서 60년 사이에 갑자기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 사후부터 목격자들의 증언이 구두전승이나 메모나 다른 다양한 형태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이 30년에서 60년 사이에 완전히 문자로 기록되어 정리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기록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사실은 복음서의 기록보다 더 앞선 문서 기록이 있습니다. 그 문서들은 사도 바울이 보낸 서신서들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다가 다메섹이라는 도시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서 기독교로 회심한 사람입니다. 이 사도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다가 A.D.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입니다.

넷째, 이 사도 바울의 편지들은 아주 초기의 기록물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는 A.D. 48년경에 기록되었고, 데살로니가전서는 A.D. 51년경에, 그리고 고린도 전서도 A.D. 51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록물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불과 18년에서 25년 사이에 기록된 문서들입니다.

다섯째,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어떤 것들은 아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 고백들을 인용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A.D. 54-55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빌립보서”의 내용 중에 2장 6-11절의 내용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 사용했던 신앙고백 형태의 시에서 바울 사도가 인용을 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또한, A.D. 54-57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알려진 “골로새서”에서 1장 15에서 20절도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시를 바울 사도가 인용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리고 바울 사도는 예수님에 관해서 자신이 인용하고 사용하는 내용들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 전서 15장 3절로부터 7절까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표준 새번역)

여기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하는 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직접 예수님을 목도한 사람들로부터 전해 받은 이야기라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 전해 받은 내용을 자신이 그대로 전했음을 말합니다. 이 사실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원래 사울이라는 기독교 핍박자였는데 A.D. 32년 경 신비한 체험으로 예수님을 만난 후 기독교로 회심을 합니다. 그리고 35년경에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사도들)을 만나러 가서 그들로부터 직접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사실들을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죽은 후, 2-3년 내에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이미 찬양시 형태로 존재해 있었던 신앙 고백들을 자신의 편지에 그대로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불과 2-3년 안에 찬양시로 존재하고 있었고, 이것을 바울 사도가 약 20년 후에 자신의 편지에 인용했습니다. 따라서, 바울 서신서는 예수님이 죽은 후에 불과 18년에서 30년 사이에 기록된 문서들입니다.

* 이제 앞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겠습니다. 단군 신화는 단군이 나라를 건립한 시기와 그것이 문서로 기록된 시기의 차이가 3,600년 입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약 1,000년의 차이, 불교는 200년에서 60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회교는 모하메드가 죽은 후 135년 후에 기록되었고,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는 그 대왕이 죽은 후 약 400년 후에 전기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기록물들이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 기록물들은 어떻습니까? 기독교 학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역사학자들도 거의 대부분이 인정할 수 있는 복음서의 기록물들은 예수님이 죽은 후 불과 30년에서 60년 사이에 거의 완전한 형태의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그 보다 앞서 사도 바울의 편지들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죽은 후 불과 18년에서 30년 사이에 거의 다 완성되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이 인용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불과 2-3년 내에 존재하고 있었던 신앙 고백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고대 종교와 문서들 중에서 성경의 기록만큼 정확한 문서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고대의 문서 중에서 일반 역사를 가름하는 잣대를 적용해 볼 때, 예수님에 관한 기록 문서들은 가장 신뢰할 만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기록들은 놀랄만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응형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브리서  (0) 2016.02.12
빌레몬서  (0) 2016.02.02
디도서  (0) 2016.01.26
디모데후서  (0) 2016.01.21
디모데전서  (0) 2016.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