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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2설교 신명(神名) 신명기(申命記) 5장 11절 본문
20190512설교
신명(神名)
신명기(申命記) 5장 11절
너희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 이름을 함부로 일컫는 사람을 죄 없다고 하지 않았다.
이름과 우리가 바라고 부르는 신의 이름
만물과 사물들은 그 본성과 형태를 상징하는 이름이 있다. 사물들만이 아니라 사람도, 신도 이름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특별히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신 이름을 부른다. 과연 그 신은 진실한 신인가? 만약 신이 우리가 바라고 좋아하는 대로의 신이라면 그 신은 우리에 의해 좌우되는 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이 된다.
이스라엘 현인과 선지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감히 부를 수가 없었다.
2. 시대에 따라 다른 목적으로 작성된 십계명
제가 아는 사람 중 여렷이 개명을 했다. 그 개명 시점 이전과 이후 다른 사람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개명한다. 사람들이 개명하는 것처럼 십계명도 개정되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20장 2-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나와 있고, 구약 율법을 10개 항목 계명으로 요약한 십계명은 기원전 13세기 이후 다윗과 솔로몬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작성된 계명들이 다시 되풀이된 게 신명기다. 출애굽기 십계와 신명기 십계명이 약간 다른 이유다. 목적이 달랐을 것이다.
그 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BC722년)에 패망하기 전 아모스와 호세아 시대인 BC 750년경 이후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요약하여 재작성 되었을 것이다.
또한 바벨로니아(BC587)에 침략 당하던 시기와 성전 재건시기에 율법과 제사 전승을 요약하여 다시 정리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초대교회 신약이 형성될 때 마태복음 22장 37-40절은 십계명을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의 강령(요약)이라고 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각각 인용하고 있다. 이유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유대인들을 비판하고 대항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모든 것에 이름이 지어지듯 십계명도 이름 지어졌고, 시대에 맞게 새롭게 다르게 해석 되었을 것이다.
3. 제3계명과 하나님 이름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축약하면 하나님이거나 인간이다.
십계명의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망령되이, 마음대로, 마구,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부르지 말라다. 하나님은 숭고하기에 문제가 많은 인간이 자기 맘대로, 임의로 부르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하나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우리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고, 그 관계 속에서 이름을 통하여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하지만 그러나 초월해 있기에 임의로 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출애굽기 3장은 모세가 이집트 노역장에서 살인 사고를 낸 후 미디안 제사장 장인 이드로에게 가 숨어 지내며 어느 날 광야를 지나 호렙산에서 양들을 칠 때, 떨기나무 가운데에 불꽃으로 나타난 하나님이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바로 왕으로부터 탈출시키라는 사명을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3장 13-15절을 읽어보자.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ㅏ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나다’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나다’는 히브리어로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YHWH, 야훼, 여호와)다. 칠십인역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 야훼 여호와는 우리말로 번역해서 이해하면 나는 나, 스스로 있는 자도 되지만 ‘나는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일 것이다’가 더 적확하다. 하나님의 이름을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로 정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은 명확하게 정할 수 없다는 뜻을 갖는다.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는 확정되지 않은, 고정되지 않는, 정해지지 않는 열려있는 하나님이다.
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확정된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과만 관계한 신이라는 말이다.
4. 우상, 주 야훼 여호와, 자유
출애굽기 6장 1-3절을 읽어보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너는,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강한 손에 밀려서, 그들을 내보내게 될 것이다. 강한 손에 밀려서야, 그들을 이 땅에서 내쫓다시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경하는 선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개별적으로 ‘엘 사다이’로 나타났으나”라는 말은 구체적인 능력을 행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여호와 야훼로는 아직 알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능력을 행한 것 보다 광범하고 포괄적이며 모든 것이 가능한 그래서 한계를 정할 수 없는 하나님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야훼, 여호와)로는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중받는 선조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조차 드러내지 않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바로에게는 전능을 넘는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 하나님, 그래서 감히 그 하나님의 이름을 히브리어 네 자음 YHWH, 칠십인역과 신약에서는 '퀴리오스(주)'로 부르는, '아도나이 주님 또는 엘로힘 하나님으로 부르는 주님으로 나타내신다는 말이다.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처럼 상상을 초월하고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이신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임의로 부르는 우상 하나님 바로 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자유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상금지 2계명과 관련되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1계명과도 관련이 된다.
물질이 최고인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인간 욕망에 갇힌 하나님이 아님을 드러내신다. 무한광대하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5. 결론
하나님과 이웃을 욕망의 소유물로 삼는 것이 우상숭배다.
탐욕의 우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자.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 야훼 여호와 아도나이 주님이신 하나님을 부르며 영원무궁 무진한 삶을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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