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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설교 다아쓰(הדעת) 시편 8편 3-4절 본문
20200719설교
다아쓰(הדעת)
시편 8편 3-4절
1. 전북대 사대 수학교육과 동창 중 8월에 전주 상업정보고등학교 정년 퇴직하는 친구가 있다. 평상시 유머가 있어 친구들에게 웃음을 주는 친구다. 건강은 항상 골골하다. 그가 지난주 목요일 병가를 냈다. 어차피 8월 정년퇴직하니, 바로 방학이고 하니 한 달 더 일찍 그만둔 것이다.
며칠 지나 어떻게 지내냐 물었더니, 산에도 가고, 병원도 가고, 아들딸 처 돌보고, 집안 일도 돕고 해서 바쁘다고 했다. 다른 친구는 집안일 하는 데 재취업했다고 축하한다고 했다.
두 가지 조언을 했다. 하나는 아들, 딸, 처를 위하고, 집안일을 돕는다고 하니 그 가족, 특히 부부 관계를 위하여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까지의 나이를 먹도록 모르고 살았던 것이 무엇인지 살펴서 즐겁게 살라고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즐겁게 사는 기원이 무엇인지 또한 배우라고 했다. 산에도 가고 한다니 즐거움 쾌는 산과 같이 우주 만물을 바라보고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깨우치면 온다고 했다. 그것들과 친밀하라는 의미의 경외하는 삶을 살라고 했다.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 것이다.
2. 인간 인식능력, 시편 8편, 쾌와 불쾌, 나의 다아쓰(הדעת) 정체성
사람은 우주와 자연, 인간과 세상을 보고 알게 되는 인식능력이 있다. 타고난 능력이다.
한편 사람은 우주 만물과 사건들을 감각 인식하여 경험으로 축적 기억한다. 배우는 것이다. 좀 더 잘 살 수 있도록 발전시키는 것이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세상 모든 것은 자기 생각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고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은 변함이 없으나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 인식능력은 세상 사는 삶을 즐거운 쾌가 될 수도, 불쾌가 될 수도 있게 한다. 쾌는 즐거움이고 행복이며 만족감이다. 사는 맛이 나는 것이다. 불쾌는 반대다.
하나님께 감동되어 쾌
시편 8편을 보면 시편 기자는 대자연, 그 너머의 절대자 하나님을 보며 감동한다.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1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2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님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위엄은 우주와 자연 그리고 사람이 사는 세상 만물과 사건을 통솔하거나 이끄는 힘이 있어 의젓함이다. 시편 기자는 우주 만물에 가득한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3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위엄이 있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보면서 시편 기자는 자신을 살피건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데 자신을 생각해주고 돌보아 주시니 감동한다.
5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7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8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9 주 우리의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하나님 당신 보다 좀 모자라게 하시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만물 위에 으뜸으로, 그것들을 다스리게 하셨으니 당신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 경외심마저 이미 나에게 주셨으니 감히 엎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교만과 자만, 이기심과 자존은 시편 기자와 같은 인식과 깨달음 속에서 절대자 신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사라진다. 신과 하나 되면 황홀감을 느낀다. 신비체험을 하는 것이다. 대자연, 인간, 세상 그 모든 것을 만든 신에 압도되면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빠지고, 그 결과 우주, 자연, 인간 너머 절대자 신과 하나가 되면 아름답고 즐겁다.
한편 인간은 불쾌도 느낀다. 불쾌는 분리(分離)고 불안이고 불평이며 괴로움이며 고통이다. 왜 불쾌한가? 경험된 기억, 정보체, 지식,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세상에는 이치가 있는데 그 이치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상식인데 몰상식해서 맘에 안 들고 화가 나 불쾌한 것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절대자와 하나 되지 않은 나이기 때문이다.
3. 즐거움 쾌를 위한, 절대자 하나님(부모의 부모)에 의해 낳은 나의 임무
최선의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마아트(타조의 깃털-건물과 신전과 우주의 중심, 인간 심장(임무)을 재는 기준)라고 했다. 우주와 자연의 법칙을 깨닫고 그 속에서 자신만이 해야 할 임무를 수행 기준이 마아트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한 평가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만이 가진 임무다.
동양에서는 중용이 기준이다.
히브리적으로는 달란트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때 만족이 있고 즐거움 쾌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불쾌한 것이다.
창세기 에덴동산에 있는 선과 악을 아우르는 깨달음의 나무, 지혜 나무가 다아쓰다. 우주 만물에 대한 이치와 남녀 관계를 앎이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지혜를 수용하는 카발라다. 신에게 부여받은 나만의 씨앗이고 임무다.
마아트, 다아쓰(지식 הדעת), 카발라, 달란트, 지혜, 씨앗, 말씀, 나, 신의 형상, 깨달은 자, 뱀, 벌거벗음, 영생, 풍요, 불로초, 아이에카(네가 어디 있느냐), 정체성, 네가 누구냐, 스스로 깨닫는 것, 어른 등등 모든 용어는 쾌(즐거움, 행복)를 위한 삶을 위해 정의된 것이다.
4.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보고 쾌를 이해하고, 신을 경외하라.
우주 만물을 알고, 인간 남녀 관계를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행복하게, 즐겁게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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