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블로그
20210207설교 자기 몸을 내어주는 십자가 복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본문
20210207설교
자기 몸을 내어주는 십자가 복음
갈라디아서 2장 20절
1. 이번 주는 설 명절이 있다.
코로나로 이번 명절에도 5인 이상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친지들과 함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족은 대부분 5인 미만일 것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가족 각자 처지와 상황과 생각이 다르기에 가족들 만나면 불편할 수 있고 갈등할 수 있다.
그러면 각자 자신을 살펴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보고, 상대가 옳은지를 생각하면 문제가 해소된다.
가족만이라도 만나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자.
성경 말씀으로 말해보자.
마태복음 10장 34-39절, 나와 가족, 친지와의 평화
34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35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37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과 관계가 아닌 가족관계에 따라 해석해보자.
36절 같은 이런 문구 내용을 보면 예수님 당시도 가족간 불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39절 처음에 “자기 목숨을 얻으려고”를 “자기가 옳다고”로 해석해보자.
보통 자기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주장하면서도 자기가 옳다고 하기 쉽다. 자기주장이다.
잘못된 자기주장은 상대방에게 관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가 되어 기분이 안 좋다. 물론 상대와 좋은 관계를 할 수 없다. 자기 주장을, 자기 목숨을, 자기를 잃는 것이다.
그래서 38절 앞부분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다.
자기 잘못을 생각해보고 반성하여 입장을 수정하란 말이다. 그러면 편안해진다. 목숨을 얻는다.
2. 마태복음 16장 21-25절, 신적행위와 인간행위, 전주 초록바위(조선시대 죄수 처형지)와 평화 세상
21 그 때부터(16장 16절, 베드로의 고백, 선생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받아 죽고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 자신이 무얼 잘못해서 자신이 반성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그들의 잘못을 받아 안아 그들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넘는 신에게서 나오는 통찰이고 섭리고 역사다.
신념으로 무장된, 고도로 성숙한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불가능하다. 보통 사람들은 남의 잘못된 짐을 지지 못한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정과 의리만 있었다. 인간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든 것이다.
남을 위해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신의 행위다.
신의 행위이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다. 기독교는 자기 유익 보다 남의 유익을, 상대를 더 생각하거나 동등하게 대한다. 그래서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1700과 1800년대 말 조선시대 전주 남문시장 건너 싸전 다리 근처 곤지산 초록바위에서 동,서학교도들이 처형되어 전주천에 수장되었다. 당시 전주천은 물이 많고 깊었다.
한가지 예를 든다.
1791년 정조(재위기간 1776-1800년) 때 전라도 지금은 충남 금산의 양반이었으며 서학교도(천주교인)였던 윤지충은 모친상에 신주를 모시지도 않고, 제사 지내지 않고, 천주교 예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외가 동생 권상연은 이를 옹호하였다. 이는 유교 주자학 가부장적 권위와 의례 의식을 거부한 것이었기에 정조는 홍국영을 보내 윤지충과 권상연 등을 처형했다. 진산(금산)사건이다. 신해 박해다.
<<중국을 통해 전파된, 우리 개신교와 다른 교회, 천주교<정교회와 천주교(가톨릭교)와 개신교를 합해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라 한다)>는 주자학의 한계를 깨달은 진보적 사상가들 서학교도와 억압받던 민중을 중심으로 1700년대 말부터 전파되기 시작했다. 1794년 청나라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천주교도에 관대한 정조로 인해 교세가 확산되었다. 정조 할아버지 영조, 그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조는 뒤지에 일주일 이상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할아버지 영조와 노론을 원망하며 자신은 그런 정치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홍국영 김홍도 정약용 등을 옆에 두고 정치했다. 천주교도에도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는 주자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 위협적이었다.
1801년 순조왕 섭정 대비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진보적 사상가와 천주교도 100여 명이 처형하고, 400여 명을 유배시켰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유배됐으며, 정약종, 최초 신부 이승훈, 권철신, 이가환은 처형당하거나 감옥에서 죽었다. 충청도 전라도 전주에서 전도하던 중국 천주교 신부 주문모도 처형당했다. 1801년 1만여 명이었던 천주교인들이 당한 신유박해다. 이후 황사영의 백서(천주교 박해를 중국 주재 신부에게 군대 요청 등) 발각으로 인하여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신부 3명과 70여 명 신자 처형되었다. 1846년 박해를 받았다. 병오박해다. 고종 3년인 1866년부터 1871년까지 병인박해가 있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정읍 태인 사람 김개남은 시천주신앙(侍天主信仰)과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으로 동학교주였다. 그는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에 의해 전주로 압송된 1894년 12월 3일 초록바위에서 처형당하고 머리만 조정으로 보내졌다. 인내천의 평등 세상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동학의 대교주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재편하면서 내세운 사상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으로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는 시천주 사상을 재해석한 것이다.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서는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 사상으로 변화되었다. 시천주 사상에서 인내천 사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초월적 존재인 하늘이 점차 인간과 하늘이 완전히 동일시되는 것을 보여준다. 천도교의 교리가 이돈화는 인내천 사상은 신이 변화·발전할 수 있다는 역동적인 신개념과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사전 인용>
사람들은 억압과 폭력 세상 속에 평화 세상을 원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한계, 잘못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의 십자가밖에 없다.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문제를, 소원을 들어주신다.
잘못된 주장을 하면 상대와 갈등한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 입장을 거두고 상대를 인정하면 평화가 온다.
3. 고린도전서 1장 12,17절, 분열된 교회와 복음과 십자가
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의 입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와 다를 때는 갈등하게 된다.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전한다고 했다.
4.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믿음 안에서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0221설교 하나님께 인정받기 요한복음서 6장 27절 (0) | 2021.02.21 |
---|---|
20210214설교 확신과 너그러움 에배소서 8장 32절 (0) | 2021.02.14 |
20210131설교 혼불과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 6장 25-34절 (0) | 2021.01.31 |
20210124설교 신비와 무지 욥기 38장 1-6절 (0) | 2021.01.24 |
20210117설교 악에서 구하소서 마태복음 6장 9-13절 (0) | 2021.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