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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9 인간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문제 로마서 3장 23-27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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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9 인간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문제 로마서 3장 23-27절

필명 이일기 2022. 1. 4.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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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9

인간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문제

로마서 3장 23-27절

 

1. 인간 구조 또는 틀과 인간 지능 기억 등 인간 능력, 컴퓨터로 말하면, 하드웨어(Hardware) 컴퓨터 기계장치 몸체 데스크탑(메인보드 중앙처리장치 CPU,GPU 등, 기억장치 RAM, SSD, HDD, USB) (입출력장치 모니터 프린터 마우스 키보드 카메라 스피커)(기타 케이스)과 소프트웨어(Software) 운영체제 Window 프로그램 Program 드라이버 Driver 펨웨어 Firmware 등은 만들어진 것임을 우리는 인식하고 이해한다. 이점은 인간과 컴퓨터가 비슷하다. 컴퓨터는 손발이 없다. 

https://youtu.be/tHTYayMjcdM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점도 차이가 있다.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유무의 차이다. 2035년에는 인간보다 많아진다는 인간로봇은 손발도 있지만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없다.

https://youtu.be/-bjtV6U5uAQ

 영화 '아이로봇'에 나오는 로봇 규칙 1. 인간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2. 로봇은 인간에게 복종하되 1원칙을 위배할 수 없다. 3.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하되 1,2 원칙을 위배할 수 없다. 인간에 지배당하고 살지만 자유의지를 갖게 되면 로봇이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다.

 

 손발과 의지가 없지만 나무는 일정 한계까지 자란다. 그 이상은 더 자라지 않는다. 유전과 무수한 자연 변수들의 환경 영향을 받는다. 열매 맺는 것 등등도 그렇다. 일정한 정도까지 자란다는 점은 사람과 같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이해하여 세상 것들을 사용하거나 즐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https://youtu.be/BY-b_gkCy9A

 가지는 어떻게 뻗어가는지? 이파리는 언제 어디서 나는지? 등은 연구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왜 나무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왜 그런 모양인지 등등은 알 수 없다. 왜 손발을 가지지 못했는지도 알 수 없다.

 

 움직이는 몸의 손과 발, 얼굴(특히 눈 입 등 근육)에 나타나는 자유 의지로 인간은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산다. 다른 개성의 인상에 따라 사람들 간 만남이 제안되면 상호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상대와 관계를 이루며 사회를 이루고 세상을 만들며 사는 것이다.

 

2.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유대인과 이방인, 그들이 만든 세상과 그 세상을 흔들어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

 로마서 3장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물론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바울의 주장이다.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다. 이 말씀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기초로 기독교를 전했다. 교회를 만들었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세상 사이의 벽을 허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 개성을 흔들고 변화시켜 그의 올바름이 드러난 역사였다. 

 

1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2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 전통 속에 살아왔다는 말이다. 유대인의 개성과 문화를 말함이다.


3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얼마가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납니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습니까?

4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성경에 기록한 바 "주님께서는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인정을 받으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에 주님께서 이기시려는 것입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소망 가운데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이 그 약속을 저버리고 배반하며 이미 예언 고지되어 세상에 나타난 메시아를 죽였다고 해서 하나님이 변화되거나 좌지우지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 배신이 하나님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5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내가 말해 본 것입니다.)
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7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나도 역시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
8 더욱이 "좋은 일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악한 일을 하자"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인간 잘못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하나님은 온전하시다는 것이 드러난다고, 악이 있으니 선이 드러난다고 악을 행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비방 이유다. 그래도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말이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다
9 그러면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 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14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15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19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아담의 원죄를 말하고 있다. 인간 모순된 삶의 원인이 무엇인가? 왜 사람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지 궁구 한 바울의 인간 현실 이해다.  구약 성서 저자들은 인간 문제점을 원인의 원인을 쫓아 인류 원조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설화다. 아담 설화의 의미는 인간은 현실에서 온전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실제 아담과 이브가 살고 있었는지 과학적으로는 증명하기 어렵다. 성경 저자들이 상징 이야기를 쓴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인 원시인 그들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 이해를 위해서 쓴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잘못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문제가 있는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25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6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인간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구약 저자들은 대속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왔다. 인간 문제를 인간이 풀 수 없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을 초월한 존재만이 그 해결의 열쇠를 지고 있기 때문에, 그와의 관계에서 바라본 관점이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위대한 점이다. 독특한 점이다. 그런데 이는 종교 일반에서 말하는 듯 하지만, 그래서 종교는 다 똑같다고 말하고자 하는 타 종교인이 있기는 하지만 명백히 다르다. 인간 문제를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고, 해결하신다는 입장이다.


27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28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29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30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31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을 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이었던 그들의 개성이 견고한 아집이 되어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올가미가 씌워진 역사를 성경 저자들은 보았다. 그것은 인간 입장에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것이었다. 이 견고한 성을 하나님이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흔들어 변화시키신 것이니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인간의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이 기독교 진리다.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결한다고 하는, 이 놀라운 역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3. 우리들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문제는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믿어 문제, 한계를 벗어나 편히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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