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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6 #나를 따르라 #마가복음 8장 34-35절 본문
20230226
나를 따르라
마가복음 8장 34-35절
오늘은 마가복음 8장 말씀이다.
1-10절 사천 명을 먹이심(마 15:32-39)
1 그 무렵에 다시 큰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2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3 내가 그들을 굶은 채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이 빈 들에서,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이 모든 사람이 먹을 빵을 장만할 수 있겠습니까?"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6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명하여 땅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들어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그들에게는 작은 물고기가 몇 마리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것을 축복하신 뒤에, 그것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8 그리하여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으며,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
9 사람은 사천 명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헤쳐 보내셨다.
10 그리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다(마가단? 막달라?) 지방으로 가셨다.
7개 빵과 물고기 몇 마리 기적은 6장의 5개 빵과 물고기 2마리 기적과 유사하다. 큰 무리 4,000명이면 전북대학교에 있는 전주실내체육관이 4,000명 수용하니 꽉 채울 정도다. 당시 마이크도 없었는데 야지에서 목 터져라 외쳐도 청중들은 듣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11-13절 표징 거절(마 16:1-4)
11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와서는, 예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그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요구하였다.
12 예수께서는 마음 속으로 깊이 (완악한 저들로 인한)탄식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다수의 불신 자들)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마 16:1-4
1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3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시험하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불신했다. 앞의 기사들에서 기적을 행한 것과는 달리 그들의 기적 요구를 거절하셨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랐다.
마태복음 16장 1-4절은 하늘의 징조와 날씨를 분별할 줄 아는데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한다고 하며 요나의 표징 외는 기적을 받지 못할 것이다고 덧붙인다. 요나가 고깃배 속에서 3일 만에 살아나는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죽었다가 부활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14-21절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누룩(마 16:5-12)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그들이 탄 배 안에는 빵이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16 제자들은 서로 수군거리기를 "우리에게 빵이 없어서 그러시는가 보다" 하였다.
17 예수께서 이것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없는 것을 두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어 있느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 너희는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열두 광주리입니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남은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광주리입니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했다. 그런데 제자들은 수군거리며 빵이 없어서 하신 말로 오해했다. 누룩을 말하니 빵에 관한 말씀인 줄 오해한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없는 빵 신경 쓸 게 뭐 있냐 없는 빵이었지만 4천 명 5천 명을 먹이고도 남았잖냐. 내가 한 말은 빵에 관한 것이 아니고 누룩에 관한 것이라고 하고, 바리새파 사람과 헤롯의 말이나 행동은 너희를 점차 부패하게 하니. 그들의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고 한 것이었음을 깨달으라고 한 말씀이다.
22-26절 벳새다의 눈먼 사람 치유
2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23 예수께서 그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물으셨다. "무엇이 보이느냐?"
24 그 사람이 쳐다보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 사람이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26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
반복되는 치유 기사다. 치유 기사들은 대부분 비슷하다. 다시 말씀 나누지만 예수님이 치유기적을 행하니 제자들도 치유기적을 행한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된다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하는데 목사에게 낫게 해 달라고 하는, 문자적인 성경 읽기를 하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마가의 복음서 기록 본 뜻은, 기적 기사를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요, 그를 따라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라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고, 기독교의 훌륭한 점이며, 우리가 믿는 이유다. 예수 믿어 축귀나 치유 또는 자연을 통제하겠다고 하면 무속 신앙으로 변질된 것이고 거짓 종교에 빠진 것이다.
27-30절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마 16:13-20; 눅 9:18-21)
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0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부분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를 축귀자, 치유자, 자연 통제자로가 아니라, 또는 세례 요한, 엘리야, 예언자를 넘어서는 그리스도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따르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축귀하는 자, 치유하는 자, 자연 통제자, 세례 요한 제자, 엘리야 제자, 예언자 제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인이다.
31-38절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마 16:21-28; 눅 9:22-27)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개역개정번역,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동족들에게 고난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 후 부활 할 것이라고 하니, 베드로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항의한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한 것이라고 베드로를 꾸짖는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고자 한다면, 각자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살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 어떤 것보다 목숨이 중요한 것이고, 어떤 것을 주고도 목숨과 바꿀 것이 있겠냐고 반문한다.
종래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자로 인정하여 받아들일 것이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면 그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복음이고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이다. 하나님 나라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인정하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삶을 사는 것은 괴로움과 고통이 없고 사람들과 갈등하지 않고 스트레스받지 않고 행복하며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그 반대의 삶, 고난의 삶을 사는 것까지도 수긍하고 사는 것이다. 로마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로 살았던 것을 참고하면 된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하나님 나라 삶을 사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외형상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차원이 다름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람의 모양으로 봐선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가 살아가는 모습은 다르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다.
전주 박물관에서 전라도와 강원도에 있는 나한(아라한, 부처) 석상들을 오늘까지 전시하고 있다. 불교에서 나한이란 깨달음의 4단계를 통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 부처다. 뭔가를 해야 하고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인간이 금욕이라는 수행을 통해 나한이 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사람의 특성을 모르던 시절 주장된 것에 불과하다. 인간 본성 욕망을 통제하여 보다 숭고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먹는 것을 통제할 수는 있으나 인간은 본래 살기 위해 먹어야 산다. 먹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수행이란 욕망을 참아내고, 하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여 나한 부처가 되어 모든 것을 관조하며 그러려니 하고 살면 허수아비 삶이지 인간적 삶은 아니다. 수행을 통해 온전한 사람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나한 석조가 보는 사람에게 행복이나 마음의 안정 등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그저 보통 사람들의 다양한 얼굴, 세파에 찌든 얼굴에 불과한 것이었다. 물론 세상 모든 것은 보는 사람 관찰자에게 영향을 준다. 똑같은 나한 상을 보며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나한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런 정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다. 그냥 석조다. 거기에 어떤 영향력이 있어서 사람에게 주술적인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다. 나한 상 외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다른 삶을 산다고 증언하고 있다. 예수를 따르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된다. 그런 삶을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고 순교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로 인해 오늘 우리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이다.
예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그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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