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블로그
1998. 3.22 주일낮예배 본문
1998. 3.22 주일낮예배
제목 : 눈물의 비디오
성경 : 고린도후서 4장1-18절(16-18절)
주제 : 무상한 삶에서도 우리는 영원한 것을 바라 보아야 한다.
구조 : 1. 눈물의 제일은행 비디오-음악과 실업자와 제일은행의 심경이 함께 어울어 져 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사람들은 이에 감동한다.
2. 인생은 무상하다.
3. 본문성경말씀 : 믿는 자는 영원한 예수를 전파하고 그를 의지하며 산다.
4. 무상한 삶에서도 우리는 영원한 것을 바라 보아야 한다.
최근 제일은행 비디오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인위적이고 아마추어적이지만, 그 비디오는 울먹이는 여직원의 고별사나 배경 음 악으로 인하여 사람들
에게 감동에 빠지게 했습니다. 정든 회사를 나가야 하는, 마지 막에 선 사람들의 심경을 잘 표현하여,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것 때문에, 더 더욱 감동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국가 경제 위
기에서 당하는 상처를 표현한 것이며, 당사자나 그 가족은 물론, 그 회사 사람들, 아니 우리사회의 구성
원 과 우리의 모든 국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겪는 인생의 무상함을 담았기 때문이었 겠지요.
우리의 목전에 있는 허망하고 덧없는 우리들의 삶 일것 입니다.
가끔은 이처럼 하나의 비디오, 또는 하나의 음악이나, 세상의 어떤 것들이 사람을 아프게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지요.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나 또는 무엇 때문에 살아왔나 하며 회한의 시간을
갖게 하지요.
인생은 무상합니다. 자랑할 그 무엇도 없고, 이렇다할 어떤 것도 없는 것이 인생 이 아닌가 합니다. 때
로는 재미있는 것 같지만 금방 무의미하고, 주변의 많은 사람 들의 구역질 나는 모습에 실망 하기도 하
지만, 때로는 그들이 불쌍하기도 하는, 그 런 인생을 우리는 사는 것이지요. 인생은 모두가 무상합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소설중에 `흑선'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정신 을 차려 보니 배 안이
었습니다. 배는 항해 중에 있었고 어찌된 일인지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이 배는 아래
부터 위까지 온통 까맣게 칠해져 있을 뿐이 었습니다. `여기 누구 없습니까?' `왜 내가 이 배에 타고 있
는 거죠?' `도대체 어디 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외쳐도 응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많
은 생 각 중에 있다 문득 뛰어내려야 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용감하게 바다에 뛰어 들었지 만 차가운 바
닷물에 발이 닫는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멍청아! 그렇 다고 뛰어내리면 어떻하나!' 이렇
게 소설은 끝나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 인생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
는지 왜 사는지. 그러나 많은 이들은 바다로 뛰어들 만큼 무모하지 않기에 살아갑니다. 저는 그 소설을
읽고 내 모습이 바로 그와 같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뛰어 내릴 용기가 없어
서 그냥 살아가고 있는...
옛날 중국의 양주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오래 산대야 100년에 불과해. 그런데 사실 100년을 사는 사람은 1,000명 에 하나도 어려워. 설사
어떤 사람이 100년을 산다고 하자. 그러나 가만히 보면 아 무것도 알지 못하고 사는 유년기, 또 아무 것
도 할 수 없는 노년기가 그 반을 차지 하니 50년, 또 환란과 질고와 고통을 당하는 기간이 많으니 이것
도 모아 놓으면 그 절반은 될 것이니 25년, 그 중에도 잠자는 시간이 거의 반은 될 것이니 사람이 100
년을 산다고 해도 결국은 10여년 밖에는 더 못돼. 그러니 마음껏 향략을 누리고 죽 음이란 것은 생각지
도 말고 아예 잊어버리라. 그저 네 눈으로, 네 코로, 네 입으로, 네 발로, 네 손으로, 네 몸으로 하고 싶
은 것, 즐기고 싶은 것은 마음껏 하라"하였습 니다.
세속 주의적, 현세주의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요 생활 철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의 지금의 고난과 상처와 절망이 우리를 영원히 이러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습니
다. 인생이 아무리 무상하고, 무의미하다 해도, 우리는 한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무상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의미가 있고, 아 름다운 것이며, 보람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생각
하면 아무런 희망이 없 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새봄이 온 것처럼 산위에 올라가 넓
은 세상을 한번 바라보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는 꽃들도 있고, 상큼한 바람도 있습 니다. 더구나 우리
들의 예쁘고 아름다운 자녀들이 천진하게 이 세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 고린도후서 4장 17,18절 말씀을 보면,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 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 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라고 써 있습니다.
예수의 사도 바울은“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은 그 마음 속에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 일을 위하여 사는 것이 참다운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 문입니다. 그는 바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보배롭고 영원한, 이 세상의 인간들을
구 원하기 위해 오신, 이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그들의 어두운 상태에서 구하시어, 영 원한 나라로 이끄
시려는 예수를, 그 안에 새기고 있었고, 또한 그것만을 위해 사는 삶이 고귀한 것임을 깨우쳤기 때문입
니다.“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그가 마음 에 받았기 때문인 것이지요.
양국의 어느 묘지에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아! 기억하 라. 당신들이 지금 존
재하듯 나도 그러했노라. 그러니 이제 내가 죽어 있듯이 당신 들도 죽어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를 준비를
스스로 하여라."예리한 식별력을 가진 방 문가가 이 비문을 읽고 난 후 그 아래에 이런 문구를 덧붙였
다. "당신이 어떤 길로 갔는 지를 알지 못하는 한, 나는 당신의 뒤를 따를 의사가 없느니라." 이 세상에
서 인생의 목적지도 없이 그저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궁극적으로 목적지 가 천국이냐, 지옥
이냐는 염두에도 두지 않고 그저 인생이라는 열차에 실려가고 있 다. 우리의 목적은 "어디로 가고 싶으
냐?"에 달려 있다. 영원한 목적지는 이 세상에 서의 삶의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예수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하고, 자신은 그렇게 선하지도 않으 면서, 예수 믿는 사람
들이 보기 싫어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 져 주시며, 영원한 평안의 나라로 인도하
시는 예수를 거부 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다 대지만, 심지어는 기독교만 종교냐 하면서 비아냥 거리지
만, 인간에게 구원을 주 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마치 폭우에 휩쓸려 가는
존재 와 같아서, 밖에서 누가 건져주는 이가 없으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육을 입 은 허망하고
무능한 자를 거쳐서 건져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 그의 섭리하시는 역사 가운데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의 십자가를 통 하여서만,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혹자는 선하게
만 살면되지 않느냐고 말하지 만, 또는 그 예수를 낳은 자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도 있지 않느냐 하
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는 없습
니다.
우리는 바울이 깨우쳐 그의 전 생애을 다 바친 예수의 길을 가야 합니다. 무상하 고 허무한 생각이 들
때,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느끼는 것처럼, 허망하고 괴로운 어 떤 것이 있을 때, 우리는 영원한 것을 바
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영원한 평안의 나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시기 여러분 되시기 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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