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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1999. 7. 18 주일낮예배

필명 이일기 2018. 11. 2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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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7. 18 주일낮예배

제목 : 사명과 소망

성경말씀 : 누가복음 181-8

주제 : 사명자는 소망이 있다.

1. 두 사람(정모, 박모)의 삶 - 재능이 있었지만 사업 실패 또는 부도 또는 사기 당함으로 그래서 자본이 없어 옛날처럼 호화스런 삶을 살지 못하는, 현재는 자신의 역량으로 브로커 노릇을 하는 두 사람, 돈을 추구하는 두 사람, 신앙을 원하면서도 그 깊이나 확신을 하지 못하는 사람, 한마디로 능력이 있는데 본질은 외면하고 잘못된, 다른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 -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 오직 돈만 있으면 잘 살 것이라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 - 불의한 재판관과 같은 사람.

2. 본문 성경말씀 - 불의한 재판관(세상을 쫓는 사람)과 한 과부(신실한 사람-소망이 있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 기도하는 삶 - 소신있는 삶 - 사명있는 삶 - 믿음있는 삶 - 상황이 어렵지만 !

3. 사명(믿음)이 있는 사람은 소망이 있다. 비록 현재의 삶이 어려워도 ! 현재나 세상에 굴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고 소망을 갖고 살자 !

항상 기도하고 - 이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오직 기도에만 몰두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갈파한 바 있거니와(살전 5:17), 이 말은 매 순간을 주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순종의 삶, 곧 생활이 바로 기도인 삶을 살라는 뜻이다. 조용한 시간을 별도로 내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되지만, 구체적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해나가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 어떤 기도 제목을 놓고 간구하는 자가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하여 지레 포기하거나 낙심(落心)하지 말라는 권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바심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반드시 응답하시되 적절한 때를 좇아 최상의 것으로 응답하신다(11:9-13;19:14). 특히 본 비유가 종말론적 주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악하고 음란한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 6절에서 예수께서 정의한 이 사람의 속성은 '불의함'이다. '불의'(unjust, NIV)라는 말은 '종교적인' 혹은 '경건한'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것으로서 세속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사람은 완전히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소위 '속물'(俗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성격은 이중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첫째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치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헬라어 동사 '포베오'(*)'무서워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공경',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의미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또한 그의 부패한 삶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두번째 성격은 그가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주로 고아나 과부같이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22:22-24;68:5;1:1)을 멸시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불의한 재판관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권력의 참 주인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법과 공의를 외면한 채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에게는 아부하고, 힘없는 자들에게는 포학(暴虐)을 일삼는다. ⭕ 한 재판관 - 이 재판관은 유대인이 아닌 것같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시비는 여기서처럼 재판정에서가 아니라 장로에게 찾아가서 가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에 나오는 재판관은 예수 당시 통치자인 헤롯(B.C. 4-A.D.39)이 임명한 재판관이거나 로마에 의해 임명된 재판관일 것이다. 이 같은 재판관은 오늘날에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권력의 하수인이거나 권력과 야

합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들로 정의에 입각한 법정신과 법관으로서의 의무마저도 잊어버린 자들이다(3:9-11).

한 과부 - 고아와 과부는 의탁할 곳이 없고 무력한 자의 표본이다. 구약에서는 이미 이러한 자들을 압제하지 말고 보호하라고 하는 명령이 반복되어 나타난다(22:22;10:18;22:9;22:3).

가서 - '에르케토'(*)'가다', '오다'의 뜻인 동사 '에르코마이'(*)의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끊임없이 되풀이하다'라고 하는 반복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도무지 의탁할 데가 없었던 이 여인으로서는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집요하게 매어 달려 간청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암시한다.

원한을 풀어 주소서 - 헬라어 동사 '에크디케오'(*)'원수를 갚다'는 말로 (1)가해자를 벌줌으로써 객관적인 공의를 세워주는 것 (2)악한 사람에 의해 탈취된 권리나 보상금 따위를 되찾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듣지 아니하다가 - 원어상으로는 '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과부의 청원을 아예 무시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공정한 법집행 보다는 사리 사욕에만 밝았기 때문에 가난한 과부에게는 무관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여인에게는 군침을 돌게하는 뇌물도 없었고 뒤를 돌봐줄 만한 세력가도 없었던 것이다.

번거롭게 하니 - '수고', '고난', '어려움'의 뜻인 '코포스'(*)는 단순히 성가시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 보다는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것, 즉 그 일 때문에 다른 정상적인 업무에 전념할 수 없게 타격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 헬라어 '에이스 텔로스'(*)'끝까지',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의 뜻이다. 재판관은 과부가 자신의 탄원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판관인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그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괴롭게 하리라 - 헬라어 '휘포피아조'(*)'아래'의 뜻인 '휘포'(*)''의 뜻인 '화스'(*)의 합성으로 이루어 진 동사로서, 문자적인 의미로는 '눈 밑을 때리다' 또는 '눈이 멍들게 만들다'는 의미이다. 이는 동양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어법(語法)으로, 얼굴에 먹칠을 당하는 것 곧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당하는 것, 또는 명예를 훼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부의 필사적인 탄원(歎願)이 성가셔서 였든 혹은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든 간에 결국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청을 들어 주었다는 데에 본 비유의 핵심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로 구하기만 하면 그것을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해 볼 수 있다(18:19;15:7).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낙심치 말고 결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신실성을 굳게 믿어야 겠다(삼상 15:29).

불의한...들으라 - 비유를 끝내고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들려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유를 주기 위한 말씀이다.

밤낮 부르짖는 - 1절의 '항상 기도하고'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이다. '부르짖다'의 뜻인 '보아오'(*)는 고뇌의 부르짖음 혹은 원조를 청하는 외침의 뜻을 의미하는 '보에'(*)에서 나온 말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애원하는 태도를 암시한다.

택하신 자들 - 이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으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자들을 나타낸다(24:31;13:27;17:14). 여기서 '택하신 자들'이란 주의 제자들로서, 과부나 고아와도 같이 예수의 죽음 이후에는 어떠한 사람도 의지할 자가 없는 무력한 자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이 의지할 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헬라어 문장 '마크로뒤메이 에프아우토이스'(*)는 주석하기에 매우 난해한 구절로 알려져 왔다. 문제는 여기에 사용된 동사 '마크로뒤메오'(*)'지체하다', '미루다'의 뜻인지 아니면 '참다', '견디다'의 뜻인지에 관한 것에 있다. 또한 전치사 '에피'(*)'...을 향해서'일 수도 있고 '...때문에'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가리키고 있는 '저희에게'란 구체적으로 택하신 자들인지 아니면 그의 원수들인지가 명확치 않다. 그리고 이 구절은 전체 문장과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독립적인 것인가하는 것도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 (1)바이스(J.Weiss), 벵겔(Bengel)등은 '택한 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오랜 참으심으로 그들에게 응답하신다'고 하는 의미로 (2)맨슨(J.W.Manson)'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그들에게 내릴 진노(震怒)를 연기하신다'고 하는 뜻을 가진 원래의 아람어적 표현이 잘못 사용된 문맥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3)리젠펠트(H.Riesenfeld)와 예레미야스(Jeremias)등은 이 구절을 양보절로 이해하여 '비록 기다리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자들을 구하지 않겠는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본다. 앞 구절과 8절과의 관련성 속에서 본다면 어쨌든 '아니'라고 하는 부정의 대답을 이끌어 내는 구절인 것은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불의한 재판관처럼 오래 지체하거나 계속 외면치 않으시고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의미이다.

속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타케이'(*)는 일반적으로는 아주 짧은 간격 뒤에 곧 일어날사건을 지시한다. 그러나 때로는 어느 정도의 기간이 흐른 후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하리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비교, 22:20'타퀴'(*). 어쨌든 이 말은 하나님의 응답이 조속히 혹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을 시사한다.

믿음을 보겠느냐 - 여기서의 믿음은 풀루머(Plummer)의 주장대로 그리스도로서의 인자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않는 기도의 자세를 견지하는 실천적 믿음일 수도 있다. 또한 이 말은 인자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많은 주의 제자들이 박해의 시대 속에서 낙망하여 허탄함에 빠지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결국 이 말 속에는 주의 재림이 늦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신령한 믿음의 길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예측이 담겨 있다. 이 점에 관해 주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바 있다(25:5). 하지만 애굽에서의 오랜 종살이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끝내 출애굽을 명하셨으며(3:10) 또한 바벨론 유수(幽囚)로 말미암아 다윗 왕국에 대한 언약이 끊긴 것으로 알고 소망을 잃었던 백성들에게 위대한 귀환은 기필코 성취되고 말았다(12:51).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 계획을 만세 전으로부터 차질 없이 하나 하나 성취해 나가셨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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