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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16 제목 : 두 가지 종류의 근심 성경 : 고린도후서 7장 9-12절 본문
20051016
제목 : 두 가지 종류의 근심
성경 : 고린도후서 7장 9-12절
1. 남아시아의 쓰나미, 파키스탄의 지진, 미국 뉴올리언즈 허리케인에 대하여 사람들은 재해라고 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지난 10년간 지진이 빈번하게 일어난 이유로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의 핵실험을 들기도 합니다. 인간들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뉴올리안즈의 허리케인 피해에 대하여 대부분의 기상예보학자들은 자동차 매연 등을 비롯한 지구 환경 파괴로 바다 온도가 상승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환경론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잘못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만의 원인이라는 것은 핵실험을 하기 전, 자동차 매연이 있기 전에도 지진, 허리케인, 태풍 등은 고대에서부터 있어왔고, 오늘날에도 있기 때문에 일리는 있지만, 부분적으로 인정을 할 수 있지만 근본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편 재해는 자연현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판구조론과 탄성반발설로 원인을 설명합니다.
판구조론은 1912년 독일 지질학자 알프레드 베게너가 제시한 것으로, 지구의 지각이 약 2억 년 전 판게아라는 하나의 대륙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표층은 10여 개의 거대한 판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액체상태나 다름없는 맨틀 위를 이동하다가 갑자기 한 판이 다른 판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지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일본이나 터키, 대만에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이들 나라가 판의 경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진은 자연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이론입니다. 탄성반발설은 지면에 단층이 존재하고 여기에 힘이 가해질 때 암석이 견뎌낼 수 있는 탄성 한계를 넘어서면 갑자기 쪼개지면서 탄성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것입니다. 두 이론 다 지진은 자연재해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들이 말하는 설명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의 원인이라고 말하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재해는 예부터 있어 온 자연현상이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재해로 인하여 사람은 피해를 당하지만 자연 자체의 치유나 회복과 변화를 목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폭우로 인해 산에서 흙더미들이 쏟아져 내려와 논밭을 뭉개고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기도 했지만, 하천에 흙이 쌓여 천이 없어지고 물길이 바뀌기도 했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각성도 하고, 대비도 하고, 심지어 그 내려온 흙으로 황폐하고 기름기 없어져 가는 논을 새로운 논을 만들기도 하는 유익이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폭우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자연재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자연 속에서, 자연히 발생하는 것이다. 원래 지진이나 태풍은, 자연현상은 자연 속에서 자연 그대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자연과 자연의 현상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은 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의미 없이 자연 그대로 그냥 존재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과 자연과 창조주가 다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미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한 것들에게 다 의미를 주고 그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에는 그것이 명확합니다. 자연재해는 자연재해로 그냥 의미 없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는, 회개를 위한 재해
누가복음 13장 1-5절을 보면, 두 가지 사건을 예로 예수님은 회개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빌라도가 성전에서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3,000명 또는 30,000명) 입니다. 이 사건을 놓고 갈릴리 유대 바리새인들은 그 학살당한 사람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당시 갈릴리 유대인들은 이들 학살자들의 가족이나 관계자가 제물을 드렸는데 그것은 거룩해야할 제물에 더러운 피를 섞은 것이라고 하면서 학살당한 사람들과 그 관계자들을 죄악시했습니다. 학살된 사람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과 관계된 제사를 받지 않는다고 인식한 것입니다. 자신들은 깨끗하고 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은 죄인이고 살아있는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며 자신들이 드리는 제사에 학살당하는 사람들과 관련한 제사를 드리는 것은 거룩하지 못하다고 이들 갈릴리 유대인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입장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를 정면 거부하고 학살당한 사람들이 죄가 많은 것이 아니고, 학살당한 사람을 죄악시하는 너희들의 죄가 결코 작지 않다고 하면서, 오히려 너희가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갈릴리 유대 바리새인들이 학살당하지 않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학살당하지 않은 너희도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가 있고 벌받는 것은 죄에 의한 것임을 기본으로 깔고 남을 탓하기 보다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물을 대기 위하여 실로암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수로 공사를 하다가 실로암 물을 관리하는, 지키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그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인식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 죽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이었다 하고 자신들은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인식을 하는 너희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로공사 때 빌라도가 성전에서 금품을 빼앗아 인부들에게 준 것이기에 그 경비는 다 본래 성전에 속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죽은 사람만 죄가 있고 죽지 않은 사람은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다 죄가 있으니 죽은 사람이야 벌을 받은 것이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학살로 인해 사람이 죽은 것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이 죽은 사건은 자연재해 또는 인재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과 마찬가지로 남 아시아 쓰나미, 미국 뉴올리언즈의 피해, 파키스탄의 피해에 대하여도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재해가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3. 누가의 관심 - 회개
신구약성경에는 회개라는 단어가 56번 사용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구약(3) 마태(7) 마가(3), 누가복음(13)과 사도행전(10), 바울서(9) 베드로서(1) 그리고 계시록(10번)입니다. 특별히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신약 아니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회개와 같은 의미의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사람입니다. 56번 중 23번 사용했으니까요. 50% 아닙니까! 누가는 회개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눅 3: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눅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10:13]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눅 11: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눅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6: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눅 17:4]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예수님은 누가복음 13장 6절에서 9절까지의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를 들어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회개에 대한 비유로 과원지기가 첫해 열매가 맺었는가 보았으나 열매가 없어서 땅을 묵히게 되니 다 베어 버리려 했으나, 하인이 거름도 주고 잘 가꿔 1년 후에 열매가 없으면 베어 버리시라 한 말씀을 하시면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서라도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한다고 말씀합니다.
4. 본문 - 세상 근심과 구원을 위한 회개
1) 세상 근심
자연 속에서 인간은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자연 속의 재료를 이용하여 사람은 살아갑니다. 농작물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공산품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기는 하지만 그 재료는 자연으로부터 채취한 것입니다. 석유, 전기 모든 것이 자연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 자연을 자연 그대로에서 나왔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그 만든 것 속에 인간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는,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세상 근심은 바로 의식주와 관계된 것입니다. 심지어 인생에 관한 문제 즉, 생노병사의 문제도 세상 근심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 구원을 위한 회개
표준새번역 고린도후서 7장 9-12절
9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슬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슬픔을 당함으로써 회개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슬퍼했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 때문에 손해본 것이 없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가져옵니다.
11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여러분에게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징계하는 정신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12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편지한 것은, 남에게 불의를 행한 사람이나, 불의를 당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쏟는 여러분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밝히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두 가지 근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조금 전에 드린 말씀처럼 세상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근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근심은 우리를 회개하도록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근심은 우리를 복되게 합니다.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합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오늘날의 그리스 남부 지역에 있던 교회인, 당시 (그리스의) 북쪽인 마케도니아가 아닌, 남쪽의 아가야에 있는 고린도교회에, 아마 1차 선교 사역은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안디옥교회가 있었던 시리아 터어키의 선교 여행이었기 때문에, 2(그리스까지 포함) 아니면, 3차 선교(이탈리아 로마까지 포함) 사역중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당시 고린도교회는 거짓사도들, 사실은 예수님의 사도들의 위임을 받아 사역하던 사람들이었겠지만, 그들의 핍박으로 인한 고난과 근심 내지는 일설에는 고린도 교회의 그들 거짓 사도들의 휘하에서 배은망덕한 어떤 교우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한 치리 문제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 교우들이 바울을 홀대했으나, 수수방관했으나 나중에 디도를 보내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안에서 저들을 위로하고, 견책하기 위하여 편지를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세상적인 근심을 하는 자와 하나님 안에서 자신들을 돌아보는 그래서 회개한 교우들에게 쓴 글이었겠지요.
바울은 세상 근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고난 받는 것을 재난당하고 피해보는 것을 오히려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수수방관하던 자들이 돌아와 완전히 변화된 것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그 변화된 사람들의 변화된 행위를 7가지 문장으로 기술한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변화된 사람들의 행동을 7가지로 묘사한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간절하게 하며”는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그 심각성을 진지하게 의식하고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심을 갖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변명하게 하며”는 대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입장에 대해 탄원(歎願)하는 것이빈다. “분하게 하며”는 바울을 공격하여 그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대자들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이 의분을 느끼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과거에 고린도 교인들은 이들에게 동조하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행위를 방임하였었음을 말합니다. “두렵게 하며”는 바울을 다시 볼 면목이 없는 것, 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사모하게 하여”는 복음을 심어준 바울을 진정한 사도로 받아들이며 예전처럼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열심있게 하며”는 회개와 성결의 실천을 위한 열심 그리고 바울을 섬기려는 열심을 의미합니다. “벌하게 하였는가”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공격한 자들을 공의에 입각하며 처벌하였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바울은 이렇게 회개하고 변화된 이들로 인하여 기뻐하였고, 그것을 결국 하나님 앞에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자기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윗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습니다(시 51:1-19).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기 전에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까지 타락하였던(마 26:24) 반면,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마 26:75). 고린도 교인들과 같이!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회개하였으며 거짓 사도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실제로 범한 잘못을 회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잘못을 범할 때 무관심했던 것을 회개한 것입니다.
5. 구원받는 회개를 하자!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변해야 합니다. 재난이 올 수 있습니다. 근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을 탓할 것도, 자연현상이려니 해서도 안됩니다. 무관심하거나 방관해서는 안됩니다.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재해에 대비하고 재난을, 고통을, 근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선한 근심을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개하여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근심 걱정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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