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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9 제목 :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 성경 : 예레미야 18장 1-12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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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9 제목 :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 성경 : 예레미야 18장 1-12절

필명 이일기 2018. 12. 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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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9

제목 :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

성경 : 예레미야 181-12

 

1. 류시화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이라는 제목의 시를 읽는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꽃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인생은 뭔가를 하고자 하고, 뭔가를 갖고자 하는 욕망이 있지만, 그러나 인생이란 빈손이다는 것이다. 그러한 욕망의 그리움 속에 빈손의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라고 읊고 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는데,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하고,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지만,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고 말한다. 다만 바람만이, 그리움만이 있을 뿐이라고 읊고 있다.

욕망에 사로잡혀 염려하고 아쉬워하고 그리워 하지만, 다 바람과 같고 쓰러져 가는 것이라고 한다. 욕망에 따라 사는 부질없는 인생 자체를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현실은 뭔가를 하고자 하고, 갖고자 하고, 얻고자 하는, 자기 맘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이 있기에 인간은 존재 하는 것이고, 그 욕망이 바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다투고 싸우고 증오하고 하는 그 모든 것마저 사라질 때, 모든 욕망이 사라질 때, 인생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에서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는 인생이라는 것은 인생사는 맛이 아닐 뿐더러 진정한 인생이 아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인간의 현실에는 욕망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인간의 욕망이 아무렇게나 사용되어도 되고, 엉망인 욕망을 가져도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욕망이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사용하여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늘 제목처럼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이 인생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러면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어떠한 자세로 인간의 욕망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 욕망의 마음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결국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말씀이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글 하나 소개 한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렇더라고 합니다.

그럽디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렇더라고 합디다.

그럽디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럽디다.

능력 있다고 해서 하루 열 끼 먹는 거 아니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남들 쓰는 말과 틀린 말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발버둥 거리며 살아봤자 사람 사는 일 다 거기서 거깁디다.

백 원 버는 사람이 천 원 버는 사람 모르고 백원이 최고인 줄 알고 살면 그 사람이 잘 사는 것입디다.

많이 벌자고 남 울리고 자기 속상하게 살아야 한다면 벌지 않는 것이 훨씬 나은 인생입디다.

어차피 내 맘대로 안되는 세상, 그 세상 원망하고 세상과 싸워봤자 자기만 상처받고 사는 것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자기 속편하고 남 안 울리고 살면 그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디다.

욕심, 그거 조금 버리고 살면 그 순간부터 행복일 텐데 뭐 그렇게 부러운 게 많고, 왜 그렇게 알고 싶은 게 많은지

전생에 뭘 그리 잘 처먹고 살았다고 그렇게 버둥대는지 내 팔자가 참 안됐습디다.

예쁘게 웃던 입가에는 어느덧 싸구려 미소가 자리 잡아 있고 적당히 손해 보며 살던 내 손에는 예전보다 만 원짜리 몇 장이 더 들어 있습디다.

그 만 원짜리 몇 장에 그렇게도 예쁘던 내 미소를 누가 팔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도매로 넘겨버렸습디다. 그럽디다. 세상 사는 일 다 그렇고 그럽디다.

넓은 침대에서 잔다는 것이 좋은 꿈꾸는 것도 아닙디다.

좋은 음식 먹고 산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디다.

사람 살아가는 것이 다 거기서 거깁디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들 갑디다.

내 인생인데 남 신경 쓰다보니 내 인생이 없어집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살 때 TV 광고를 그대로 믿고, 친구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살 때가 좋은 때였습디다.

그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디다.

언젠가부터 술이 오르면 사람이 싫어집디다.

술이 많아 올라야 내 진심이 찾아오고 왜 이따위로 사느냐고 나를 몹시 괴롭힙디다.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건지?

잘 살아가는 사람은 그걸 어디서 배웠는지 안 알려 줍디다.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 내 눈에는 피눈물 난다는 말, 그 말 정말입디다.

누군가 무슨 일 있느냐고 물을 때 난 그 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깨가 굽어 있습디다.

죄 없는 내 어깨가 내가 지은 죄 대신 받고 있습디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다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고 정말로 기쁘고 유쾌해서 웃어본 지가, 그런 때가 있기는 했는지 궁금해집디다.

알수록 복잡해지는 게 세상이었는데 자기 무덤 자기가 판다고 어련히 알아지는 세상 미리 알려고 버둥거렸지 뭡니까

내가 만든 세상에 내가 질려 버립디다.

알아야 할 건 왜 끝이 없는지 눈에 핏대 세우며 배우고 배워가도 왜 점점 모르겟는지

남의 살 깍아 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내가 남보다 나은 줄만 알았는데 돌아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둘러보니 이제껏 내 살 내가 깍아 먹고 살아왔습디다.

그럽디다. 세상사는 일 다 그렇고 그럽디다.

왜 그렇게 내 시간이 없고 태어나 살아가는 게 죄란 걸 뼈에 사무치게 알려 줍디다.

망태 할아버지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무서워하던 그 때가 행복했습디다.

엄마가 밥 먹고 '어여가자' 하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물 마른밥 빨리 삼키던 그 때가 그리워집디다.

남들과 좀 틀리게 살아보자고 바둥거리다 보니 남들도 나와 같습디다.

모두가 남들 따라 바둥거리며 지 살 깍아 먹고 살고 있습디다.

 

이 글은 인생의 회한과 어려움, 그리고 푸념을 넋두리 한 것이라고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 허무를 경험하며 인생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이렇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 우리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 인간의 자율 능력과 불신자와 신자의 삶

특별히 욕망이 있는 사람이,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믿는 삶인가?

사람에게는 사람의 자율 능력이 있다. 때문에 그렇게 믿고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우리는 불신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자율 능력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제대로 그 능력을 발휘하며 살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한다고 믿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이 할 일을 하나님께 맞기면 되는가?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께 상의 하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이 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믿는 사람이다. 사람에게 자율 능력이 있으니 그 자율 능력만으로 최선을 다하여 발휘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3. 기도의 능력과 응답

인간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데 기도처럼 효과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미신적인 기도의 능력은 배제하자.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이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데 뿐 만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에 능력을 나타내주시도록 하는 사람들의 욕망의 기도다. 그 때 그 기도의 능력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느냐에 관련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의 계획 가운데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내 기도가 내가 바라는 때에, 그리고 나의 원대로가 아닌 다른 형태로 응답되어 결과적으로는 응답되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진실한 기도는 응답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도는 응답되기도 하고 응답되지 않기도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여 기도하면 무조건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된다고 알고 있다.

기도의 능력을 오해하는 예에 대한 김인환 교수의 비판과 하나님의 섭리

기독신문, '기독논단'", 의술도 하나님의 치료행위다"

김인환 목사(총신대 부총장) 19990908() 12:00:00

최근 소아암을 앓고 있는 신애양의 아버지가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기도로 병을 고치겠다고 하여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완치율이 높아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면 곧 나을 수 있는 질병이었기에 그 물의의 파장은 더욱 컸던 것 같다. TV방송국에서 2만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 사건을 아동학대로 본다는 결해가 94.9%에 이르고 신애 양에 대한 연민의 소리와 함께 부모에 대한 분노의 소리가 서울역에 마련된 중계차를 통해 전국으로 방영됐다. 이례적으로 대통령까지 대변인을 통해 입장 표명을 하면서 대책을 마련하도록 지시할 정도였다. 이 사건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혐오감을 일으킨 사건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신애양 아버지의 태도에서 그가 철저하게 기도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실한 신자라면 누구나 신애양의 아버지처럼 그는 당연히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매우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행위다. 만약 어려움을 당했을 때 기도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신자일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의 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기에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우리들의 말씀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다. 기도는 우리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통로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사를 주장하는 유일한 존재임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도는 필수적이며 이런 점에서 기도는 모든 문제 해결의 궁극적 대책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치유사역을 계속하시며 기적적 방법으로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 질병의 치유를 간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기도에 대한 광신적인 태도에 있다. 하나님께 아뢸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믿음으로 꼼짝 달싹하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기도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의 반응이며 또한 그 믿음대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 기도만 해놓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우리들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 기도한 내용을 얻기 위해 인격적으로 행동을 일으켜야 한다. 이때 기도의 능력은 나타날 것이며, 우리들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과학은 나날이 발달하여 인간의 모든 삶을 아주 편리하게 해 주고 있다. 인간 능력의 발달은 그만큼 과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인간의 능력과 과학의 발달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인간을 자고하게 만들고 인간 이외의 존재는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도 어느덧 기도의 필요성을 별로 절감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의 판단에 따라 스스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과학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대항하는 적으로 여겨진 나머지 과학에 의존하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아마 신애양의 아버지도 이러한 마음에서 치료를 거부했음직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 땅을 채우고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였다. 예수님은 제2의 아담으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명령을 다 이루시고 하늘과 땅을 통일시켜 친히 왕이 되시고 또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이 땅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정복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 땅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정복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인간의 모든 삶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야 함을 지시하고 있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다. 과학은 인간의 삶의 열매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의 뜻을 이루는 한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이러한 과학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기를 바라신다. 인간의 질병의 치료에도 예외는 아니다. 이는 마치 건축술과 기타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가장 훌륭한 건물을 지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가장 잘 증거 하도록 하신 것과 마찬가지다. 기도하는 자가 이불이나 집 등 과학의 이기를 활용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듯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식으로 치료하기도 하시지만 필요에 따라 의료기술을 잘 활용하여 인간의 질병을 고치시는 치료의 하나님이심을 잊어선 안 된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며, 칼빈주의자들의 일치된 견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질병에 걸렸을 때마다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 질병을 치유해 주시기를 고대하면서도 또 한편 의료기술을 포함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질병의 치유를 도모해야 한다.

 

4. 본문 말씀

예레미야 181-12절 읽으며 말씀 나눈다.

 

사람들은 자기 맘대로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그가 하시는 그의 주권을 인정하라. 내 맘대로 안 된다고, 내가 기도한대로 안 이루어주신다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세상 만물과 인생은 하나님 손의 진흙이다. 누가 감히 자신의 욕망대로 안 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이다. 우리의 투정에 길이 참으신다. 그러나 도를 넘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길로 나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요 그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의 계획을 세워 두셨음을 알아야 한다.

 

5.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의보다는 자신의 의를 내세운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자신의 의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의를 내세우며 산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보다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도록 증거하고 전도하기 바란다. 이 가치관과 신앙이 사람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줄 믿는다. 이 대열에 서신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복으로 점철되기를 축원한다. 이 복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도록 우리는 전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특히 믿다가 믿지 않거나, 믿음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돌아보도록 하며,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할 책임을 다하는 여러분 되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한다.

 

시편 141-4절을 읽는다.

 

로마서 81-17절 말씀 다 같이 읽고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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