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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4성탄전야예배 제목 : 예수님의 태어나심 누가복음 2장 1- 7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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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4성탄전야예배 제목 : 예수님의 태어나심 누가복음 2장 1- 7절

필명 이일기 2018. 12. 9.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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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4성탄전야예배

제목 : 예수님의 태어나심

누가복음 21- 7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날을 기억하고 축하한다. 그런 것보다 위대한 역사인 메시야의 탄생을 기록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을!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기록한 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의 탄생 기록은 마태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다. 각 복음서의 기록 의도와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신자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

 

예수의 탄생

1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3 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

4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

5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6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7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는 로마 시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통치하에 구레뇨(Quirinius)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2:1-2) 유대 헤롯 왕 때(2:1)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셨다. 복음서 기자 마태와 누가는 예수의 탄생에 관하여 자세히 전해주고 있다. 이들이 예수의 출생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한 이유는 예수의 출생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롯-아켈라오스, 헤롯 안티파스, 빌립

 

로마의 제1차 삼두정치 시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폼페이우스(공화정 집정관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 수장)-시저(황제체제로 전환)-시저 양아들 부르투스와 카시우스- 2차 삼두정치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시저의 조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황제체제 확립-황제 원로원 평민회)-옥타비아누스(BC31-AD14)

아우구스투스가 령을 내릴 즈음에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가정해 봅시다(즉 기원후 6). 이때는 헤롯대왕의 사후임으로 갈릴리는 그의 아들 헤롯왕의(헤로데스 안티파스) 지배하에 있었고 유대땅은 다른 아들 아켈라우스의 영역 (기원후 6년까지), 또는 그의 후임 총독의 지배하에 있었다.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가 통치하던 때였다. “이 때에 가이사 아우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1). 여기서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가리킨다. 그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였으며, 원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누이동생(Julia)의 딸(Attia)의 아들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입장에서 보면 외할머니의 오빠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던 것이다. 그는 18세 되던 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의해 그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래서 그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물려받아 옥타비아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되었다. 그는 주전 31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후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한 단독통치권을 쥐게 되었으며, 주전 30년에는 로마의 최고사령관’(Imperator)과 로마원로원의 수장’(Princeps)가 되었다. 그리고 주전 27년에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 칭호는 숭고한 자, 고귀한 자, 지고자(至高者)’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거의 신적(神的)으로 들리는 묘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이 칭호를 부여받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았으며, 그가 죽고 난 후에 그는 실제로 신격으로 불리며 숭배받게 되었다. 그런데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실권을 잡은 지 얼마 후에 로마 제국의 통치 기반을 든든히 하기 위해,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국세조사 곧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 목적은 세금 재원을 파악하고, 유사시의 군대 동원 능력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처음 실시한 해는 주전 28년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주전 8년에 실시되었다고 한다.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주후 6년에도 실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본문 2절에 보면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처음 한 것이라고 한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에 의하면 구레뇨 곧 퀴리니우스(Quirinius)주후 6년부터 수리아의 총독을 맡았다고 한다(Ant. XVIII,1). 그렇지만 주후 6년은 예수님의 탄생 연도로는 너무 늦다. 그래서 누가의 이 기록과 예수님의 탄생 연대 사이에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윌리엄 램지(W. Ramsey)에 의해 발견된 비문(碑文)들에 의하면, 구레뇨는 그 이전부터 수리아를 다스렸다고 한다. 주전 12년부터 수리아의 최고 사령관’(commander-in-chief)을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 개역판 성경에는 수리아의 총독 되었을 때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총독이란 말이 없고 구레뇨가 수리아를 다스릴 때로 되어 있다. 구레뇨가 수리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을 때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구레뇨가 수리아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을 때를 말한다. 따라서 구레뇨가 수리아를 다스리고 있을 때 시행된 두 번의 인구조사 중 첫 번째 것, 곧 주전 8년에 시행된 국세 조사(호적)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연도는 도대체 몇 년인가? 성경의 기록과 아우구스투스의 호적 명령과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실제로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는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 여사이다. 그는 일본인 여자로서 로마 제국의 역사를 아주 재미있고 깊이 있게 쓰고 있다. 헬라어와 라틴어 원전을 섭렵하여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재미있게 풀어쓰는 그의 지식과 솜씨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상숭배의 나라 일본 출신으로서 일신교보다는 다신교를 칭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책 곳곳에 은근히 반기독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심지어 그의 여성 편력까지도 아름답게 미화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비기독교적인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은 역시 별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는 그의 책 제6권에서 예수님의 탄생 연대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p.322). 곧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계산하는 서력으로 기원 1년에는 국세 조사가 실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의 이런 의문에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준 연구자는 지금까지는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사실 기독교계에서는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 초보적인 상식에 불과하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있는 서력(西曆)은 주후 525년에 수도승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도입한 것인데,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연도를 새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때 그가 계산을 잘못 해서 약 4~5년 정도의 오차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래서 후대에 와서 다시 정밀하게 계산해 보니 예수님의 탄생 연대는 주전 4~5년경이라는 이상한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탄생연도를 기원 1년으로 보고 있다고 (자기 혼자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기독교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확실한 것은 헤롯 대왕이 주전 4년 유월절 직전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헤롯 대왕이 죽기 얼마 전에 탄생하셨다는 것이다(2).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대개 주전 41, 2월 또는 주전 512월경으로 잡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전 6, 드물게는 주전 7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적 명령 연도인 주전 8년과는 2~4년의 차이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국세 조사라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단 며칠 사이에 해치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교통 통신의 미비, 행정 체제의 미비 등으로 인해 국세 조사에 수년이 걸리는 것은 예사였다. 이 점은 이방인 역사가 시오노 나나미도 스스로 말하고 있다. “로마인들은 이런 종류의 조사에 익숙해져 있었고, 지방자치단체(무니키아)를 중심으로 이런 조사에 필요한 조직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속주에서는 본국과 같은 효율성을 요구할 수 없고, 따라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몇 년이 걸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로마인 이야기, 6, p.18).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옛날부터 인구 조사라 하면 기겁을 하였다. 왜냐하면 옛날에 다윗 왕이 인구조사를 하다가 하나님께 호되게 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 3일 동안 유대 전역에 온역’(전염병)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죽은 자가 7만 명이었다고 한다(삼하 24). 그 후로 유대인들은 인구 조사라 하면 극구 반대하였으며,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5:37 참조). 그래서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헤롯 대왕은 유대 지역에서의 국세 조사를 연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결코 서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시하더라도 지파별로, 가문별로 조금씩, 조금씩 시행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 지파 다윗 가문이 호적할 때인 주전 4, 5년 경에 탄생하시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의 예수의 탄생

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20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23 10)"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7:14(칠십인역)

24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로마 장군의 입신과 출세는 정복지를 속주로 만드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에 의하여 시리아(B.C.66)와 팔레스타인(B.C.63)이 속주로 되었으며, 당시 최후의 거대 헬라 국가였던 애굽도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파함으로써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B.C.31). 애굽을 정복한 후, 로마는 정복지의 확장보다는 내부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로마제국의 결속력은 적적인 중앙집권적인 행정 때문이 아니라 로마의 절대적인 우월성의 산물이었다. 자치권은 로마제국의 징세 상납, 징병 수용, 황제숭배 의식 준수의 전제 하에서 허용되었다.

이러한 힘의 억압논리의 정황에서, 유대인들의 유일신앙은 로마제국에게 골칫거리였다. 유일신앙으로 무장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제국이 유대인에게 황제숭배를 강요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정황은 결과적으로 헤롯 왕조의 유대 통치에 대한 배경이 되었다. 헤롯 가문의 유대 통치는 안티파터 2세의 유대 총독부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사후, 그의 아들인 헤롯 1세는 당시 로마 원로원을 장악한 안토니우스와 시저의 조카 옥타비아누스에 의하여 전 유대지역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역사적 예수의 출생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

가이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적령

다윗의 자손인 요셉은 당시 북부 갈릴리 지역의 마을인 나사렛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정혼한 아내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한 상황 속에서 만삭이 되어가고 있었다. 만일 호적칙령이 없었다면 예수는 나사렛에서 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예언자들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황제의 호적 칙령을 사용하시어 요셉과 마리아를 그의 고향마을인 베들레헴에 가게 하신다. 여기에 구속사와 세속사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안에서 맞물려 돌아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신학자로서 누가는 신으로 숭배를 받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그가 실현한 로마의 평화(Pax Romana)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및 그의 오심으로써 개방된 하나님의 평화(shalom of God)를 대비시키고 있다: 그는 영적 환상을 보고서 다음같이 기록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6).

 

Q: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후 헤롯의 박해를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태어나신지 8일에 예루살렘에서 할례를 받으신 후 나사렛으로 내려갔다는 것으로 되어 있고 애굽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동일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A:

1. 4복음서는 공통적인 자료를 다루고 있는 반면, 또 그것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성경 신학적인 용어로 "공관복음서 문제"라고 부릅니다. 성경 신학자들은 왜 공관복음에 이러한 공통점과 아울러 차이점이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많이 토론하고 이야기 해왔습니다. 그리고 일부 자유주의 측에서는 공관복음간의 차이점을 들어 성경의 오류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2. 공관복음서에 차이점이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복음서를 받는 수신자(독자)가 달랐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각 복음서 저자들은 각자 자기의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적절하게 자료를 선택하여, 그들에게 맞는 신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의 경우는 유대인을 위해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연 예수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마태의 경우는 복음서를 진행할 때마다 한 사건을 기록하고 나서 ".....한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말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약 성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의 경우는 헬라(또는 로마)의 고위직에 있던 데오빌로 각하에게 그의 복음서를 썼습니다. 누가는 자신이 실제로 사람들을 방문하고 또 자료를 찾아서 데오빌로가 들은 복음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서 그의 복음서를 썼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마태복음에 비해 구약 성경의 인용이 적고, 예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한 메시아라는 점을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 역사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에게 쓴 글이기 때문에, 비교적 다른 복음서에 비해 역사, 정치적인 배경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2:1-2).

3. 이러한 원리는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 탄생 사건에서 예수께서 "다윗의 위를 이은 합법적인 유대인의 왕"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아기 예수를 방문한 동방 박사의 경배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동방 박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윗의 위를 이은 합법적인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헤롯의 박해 사건도 유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헤롯은 다윗의 후손이 아니었으며(에돔 족속), 따라서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비합적적인 왕이었습니다. 마태는 헤롯이 불법으로 왕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가문에서 합법적인 왕, 즉 예수를 보내어 그를 영원한 왕으로 세우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의 박해와 애굽 피난 사건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반면에 로마 관리에게 글을 썼던 누가의 경우 헤롯 사건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유대 왕 헤롯보다 로마 황제와 관련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었습니다(2:1-2 참조). 누가는 목자가 아기 예수를 방문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인류, 특히 가난한 자를 위한 구주로 오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누가는 마태복음에서 생략한 시므온과 안나의 증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께서 "만민을 위해 예비된", "이방을 비추는 빛", 즉 인류의 구주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2:31-32). 그러나 누가는 로마인에게 관심이 없는 헤롯의 박해와 애굽 피난 사건은 생략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께서 나사렛 가서 사신 사건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의사였기 때문에 마태가 기록하지 않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의사의 관점에서 세밀하게 기록하기도 했습니다(2:40, 52).

4. 이와 같이 복음서 기자들이 같은 사건에 대해 차이점이 나타나는 주 원인은 복음서 저자들이 자기 독자에게 적합한 주제를 선택하여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정치인과 유교 학자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졌다고 합시다. 이 경우 저는 정치인을 위해 준비하는 복음의 메시지와 유교 학자를 위한 복음의 메시지의 내용을 다르게 준비할 것입니다. 물론 제가 전하는 중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곰곰히 생각해 보면 왜 복음서 저자들이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서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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