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블로그
20220501 찾으면 찾고 버리면 버린다 역대지하 15장 1~4절 본문
20220501
찾으면 찾고 버리면 버린다
역대지하 15장 1~4절
오늘은 5월 1일 주일로 5월 초하루다. 이스라엘 백성은 초하루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는 초하루를 안식일과 동급으로 말한다. 이사야서 66장 23절, ""매달 초하루와 안식일마다, 모든 사람이, 내 앞에 경배하려고 나올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민수기 28장 11~15절, "너희의 달력으로 매달 초하루마다, 너희는 나 주에게 번제를 바쳐라.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일곱 마리를 흠 없는 것들로 바쳐라." 이는 메소포타미아, 곧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당시 지역과 문화의 영향이었다. 초승달신을 섬기며 벌이는 축제(축제는 제사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것을 본 따 우리나라 어떤 교회들도 초하루 예배(월삭(月朔), 그 달의 초하룻날)예배를 드린다.
우리나라 예배는 대부분 주일 낮 예배와 저녁 예배 밖에 없었다. 수요기도회, 매일 새벽기도회는 모임이었다. 그런데 저녁예배 대신 주일 오후 예배 또는 석양 예배로 드린다. 시대와 문화적 상황에서 바뀐 것이다. 불변은 아니다. 사회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다. 금요기도회 모임도 추가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상황에 맞게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절기 예배는 성탄절, 주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신정절 외,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예배를 주일 낮 예배에 드렸다. 그러나 각각의 의미와 형편과 상황에 맞게 선택하여 드린다.
예배 순서도 그렇다. 오래전에 서양에서 작성된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삽입하거나 빼기도 한다. 예배 기원, 축원도 마찬가지다. 각자 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개교회주의를 존중하고 있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일장일단이 있다. 시대와 지역 입장에 따라 예배나 예배 순서를 취사선택하여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다. 살고 있는 시대와 지역이 중요하다.
우리 지역과 선조들을 알아야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전에 한 번 잠깐 나라 이름을 전주 지역 입장에서 말한 바 있다. 전주 지역은 마한, 백제, 신라, (후)백제(후백제도 사실은 백제였다. 후대 사람들이 구분하기 위하여 후백제를 사용한다.), 고려, 조선, 대한민국이다. (고)조선(고조선은 조선이었다. 후대 사람들이 고려 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고조선을 사용한다.), 고구려, 발해, 가야 등등은 전주 지역이 아니었다. 물론 나라적으로 보면 다 포함된다.
본래 우리 선조들은 현 중국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 부여에 살았다. 그들이 점차 이주하여 우리나라에, 그리고 일부가 우리 전주 지역에 정착한 것이다.
더 넓혀서 생각하면 우리 선조들은 아프리카에 살다가 중동과 유럽을 거쳐 인도 중국으로 이주하다가 우리 지역에 정착했다.
우리 지역 선조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참고 1. 기원전 18년경? 건국된 백제는 처음에는 십제였다. 십제는 온조가 한강 남쪽 하남 위례에 세운 마한 여러 부족 중 한 부족의 명칭이다. 그들은 본래 졸본부여(고구려, 국내성, 압록강 중류, 현 평양?) 사람이었다. 그들이 남하하여 인천 미추홀에 정착하여 부족을 이룬 비류는 그의 동생이 한강 남쪽 하남 위례에 세운 십제 부족공동체에 합체된다. 그래서 십제가 확장된,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나라라는 이름의 백제는 6세기경까지 훨씬 오래전에 이주하여 정착해 살고 있던 54개 연맹체 마한을 점차적으로 지배한다. 처음엔 [한성(하남 위례성)] 백제였다.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476년경), 웅진에서 사비(부여)(538년경)로 천도하였고, 금마(익산)에 왕궁도 경영하였다. 백제는 강력하고 화려한 나라로 운영되다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660년경 백강(백마강 또는 금강) 기벌포(충남 서천군 장항 금강 하구둑? 근처) 전투에서 패전한다. 마지막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 낙양으로 잡혀갔다. 한편 왜에 외교상 가 있던 의자왕의 다른 아들 풍은 왜 지원병과 함께 돌아와 최후에 부안 개암사 근처 우금산성과 부안 백산면에 있는 백산성에서 의자왕의 사촌 동생 복신과 함께 백제 부흥을 위했으나 내분으로 복신을 죽여 결국 나당연합군에 패하여 고구려로 망명한다. 의자왕과 낙화암 삼천궁녀 이야기는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의 신라 입장에서 본 완전한 조작이었다. 200여 년 후 892년경에 다시 견훤은 본래 경북 상주 사람인데 무진주 광주에서 발군하여 완산 전주에 도읍을 두며 백제를 경영하였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 나라를 넘겨주어 우리 지역은 고려가 되었고, 조선으로 이어졌으며, 현재 대한민국이다.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하여 우리 지역 선조들의 뿌리를 말했다.
참고 2. 고구려 건국 시조는 중국 요동지역 북부여 왕 우태 해모수의 둘째 사위이자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이주하여 왕이 되었던 주몽왕(중국 삼국지 고구려전에 나오는, 왕망이 세운 신나라 9~25 년 무렵 고구려왕 추 등장,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추모왕이라 했다.) 또는 동명왕(졸본부여의 시조)이었다. 3~4세기 작성된 주몽 설화는 이전의 동명 설화를 베낀 것이다. 아버지 해모수의 서자이고 어머니는 강의 신 하백의 딸 유화 부인 또는 졸본부여 연타발의 딸 소서노다. 주몽의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은 유류(고구려 2대왕)다. 유류의 이복동생이 비류와 온조(백제(남부여) 시조)다.)
타종교에서도 배울점은 있다.
우리 지역에서는 유, 불, 선과 기독교가 공존하고 있다. 그러한 전통 가운데 우리는 산다. 우리가 믿는 믿음을 지키되 타 종교에서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우리만의 특성을 가지고 예배형식과 순서로 드린다. 지난주에는 노자의 도덕경, 도교 경전 내용까지 말했다.
성경은 우리 기독교 경전을 부르는 명칭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경전도 원칙적으로는 성경이다. 종교의 경전이 성경이니까. 불교는 수많은 경전이 있고, 도교의 도덕경도 성경이며, 원불교 경전 교전(敎典) 등은 오늘날 원불교 전서라고 부른다.
각 종교마다 특색이 있다. 다 다르다. 혹 종교에서는 자기 종교 중심에서 경전 또는 종교는 다 같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차이가 있다.
타 종교는 대부분 인간 교주들이 깨달은 진리를 담고 있지만, 기독교는 역사서이자 잠언이자 신의 계시라고 믿어왔다. 쉽게 말하면 타종교는 인간적이고 기독교는 신적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인간의 말이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종국에 인간 삶을 신과 관계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독특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믿는 종교만이 아닌 타 종교도 배울 점이 있다. 우리가 믿는 신앙에 철저하되 타 종교의 장점을 인정해주고 참고하는, 폭넓고 아량 있는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타종교는 대부분 본질적으로는 종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신과의 관계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전적으로 종교(宗敎)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일 또는 그러한 믿음의 체계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종교를 종교가 아니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인간적 깨달음 부분이 있고 그 깨달음이 신적 영역에까지 초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타종교를 말살하는 장면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확고한 신앙 안에서는 당연하지만 그러나 폭넓은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수 있다.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역대지하 14~16장은 유다 왕 아사 일대기를 기록하였다. 예언자 아사랴와 선견자 하나니 시대였다. 임금과 백성이 하나님을 찾고 그를 의지할 때 유다는 강한 나라가 되었고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해도 승리했으며 전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사왕은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이 아닌 우상(아세라 목상)들을 불살라버렸다는 것이다. 타종교의 신상을 불살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했고 전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때는 하나니 말대로 전쟁에 휘말렸고 결국 발에 병이 들어 위독하게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런 단순한 행동이 중요한가? 오히려 그 배경과 함축된 주제가 뜻이 더 중요하다. 그것들은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보이게 하기 위한 느끼게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14장
1 아비야가 죽어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잠드니, '다윗 성'에 장사하였고, 그의 아들 아사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아사가 다스리던 십 년 동안은 나라가 조용하였다.
2 아사는 주 그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하였다.
3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석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부수었다.
4 그는 또 유다 백성에게 명령을 내려서, 주 조상들의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게 하였으며,
5 또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 버렸다. 그의 통치 아래 나라는 조용하였다.
6 주님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나라가 조용하였고, 여러 해 동안 아무도 그에게 싸움을 걸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사는 유다 지방에 요새 성읍들을 만들 수 있었다.
7 그는 유다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 성읍들을 다시 세웁시다. 성벽을 둘러 쌓고, 탑과 성문과 빗장을 만듭시다. 우리가 주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주님께서 사방으로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읍들을 세우기 시작하여, 일을 잘 마쳤다.
8 아사에게는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유다 출신 군인 삼십만이 있었고, 작은 방패와 활로 무장한 베냐민 출신 군인 이십팔만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용감한 정예병이었다.
9 에티오피아 사람 세라가 유다를 치려고, 백만 대군에 병거 삼백 대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마레사에 이르렀다.
10 아사가 그를 맞아 싸우려고 나아가,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을 치고,
11 주 그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주님, 주님께서 돕고자 하실 때에는, 숫자가 많고 적음이나 힘이 세고 약함을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이 무리를 물리치러 왔으니, 주 우리의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주님,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이기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
12 주님께서 에티오피아 군을 아사와 유다 군 앞에서 치시니, 에티오피아 군이 도망쳤다.
13 아사와 그를 따르는 군대가 그랄에 이르기까지, 에티오피아 군대를 추격하며 무찔렀다. 에티오피아 군은 주님 앞에서와 주님의 군대 앞에서 패망하고 말았으므로,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유다 군은 대단히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14 주님께서 그랄 주변의 모든 성읍 백성들을 두렵게 하시니, 유다 군이 그 모든 성읍을 치고 약탈하였다. 그 성읍들 안에는 전리품으로 가져 갈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15 또 가축들을 지키는 자들의 장막을 덮쳐서 많은 양과 낙타를 사로잡았다. 그런 다음에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15 장
1 하나님의 영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내리니,
2 그가 아사 앞에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사 임금님과 온 유다와 베냐민은, 제가 하는 말을 들으십시오. 임금님과 백성이 주님을 떠나지 않는 한, 주님께서도 임금님과 백성을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임금님과 백성이 그를 찾으면, 그가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과 백성이 그를 버리면, 주님께서도 임금님과 백성을 버리실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참 하나님이 없이 지내 왔습니다.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었고 율법도 없었습니다.
4 그러나 이스라엘이 어려운 일을 만나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돌아와 그를 찾으면, 주님께서는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5 그 때에는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서, 땅 위에 사는 모든 백성이 마음 놓고 평안히 나들이도 못하였습니다.
6 나라와 나라가, 성읍과 성읍이 서로 치고 무찌르는 판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온갖 고난 속에서 고통을 받도록 버려 두셨기 때문이었습니다.
7 그러나 임금님과 백성은 기운을 내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임금님과 백성이 하는 수고에는 상급이 따를 것입니다."
8 아사는 이 모든 말, 곧 오뎃의 아들 아사랴 예언자가 전하여 주는 예언을 듣고, 용기를 내어, 유다와 베냐민 온 지방과 에브라임 산간지역의 점령지역 성읍에서 역겨운 물건들을 없애 버렸다. 그는 또 주님의 성전 현관 앞에 있는 주님의 제단을 보수하였다.
9 그는 또 유다와 베냐민의 모든 백성을 불러모으고, 그들에게로 와서 함께 살고 있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지파 소속의 백성도 모두 불러모았다. 주 하나님께서 아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아사에게로 모여들었다.
10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것은 아사 왕 십오년이 되던 해 세 번째 달이었다.
11 그 날 그들은 그들이 가져 온 전리품 가운데서 소 칠백 마리와 양 칠천 마리를 주님께 희생제물로 잡아 바치며,
12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조상의 하나님만을 찾기로 하는 언약을 맺었다.
13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자는, 젊은 사람이든지 나이 많은 사람이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가릴 것 없이, 누구든지 다 죽이기로 하였다.
14 사람들은 함성과 쇠나팔 소리와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주님께 큰소리로 맹세하였다.
15 온 유다 백성은 이러한 맹세를 하는 것이 기쁘기만 하였다. 그들은 마음을 다해 맹세하고, 정성을 다해 주님을 찾았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셨고, 사방으로 그들에게 평안을 주셨다.
16 아사 왕은 자기의 할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다고 해서,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아사는 자기의 할머니가 만든 혐오스러운 우상을 토막내어 가루로 만들어서, 기드론 냇가에서 불살라 버렸다.
17 그렇다고 산당이 모두 제거된 것은 아니었지만, 주님을 사모하는 아사의 마음은 평생 한결같았다.
18 아사는 자기의 아버지와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친, 은과 금과 그릇들을 하나님의 성전에 들여놓았다.
19 이 때부터 아사 왕 삼십오년까지 전쟁이 없었다.
16장
1 아사 왕 삼십육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고, 어느 누구도 유다의 아사 왕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2 그러자 아사는 주님의 성전 창고와 왕실 창고의 모든 은과 금을 모아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시리아의 벤하닷 왕에게 보내며 말하였다.
3 "나의 아버지와 그대의 아버지가 서로 동맹을 맺었듯이, 나와 그대도 서로 동맹을 맺도록 합시다. 여기 그대에게 은과 금을 보냅니다. 부디 오셔서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과 맺은 동맹을 파기하시고, 그가 여기에서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4 벤하닷은 아사 왕의 청을 받아들여, 자기의 군사령관들을 보내서, 이욘과 단과 아벨마임과 납달리의 양곡 저장 성읍을 치게 하였다.
5 바아사가 이 소문을 듣고는, 라마 건축을 멈추고, 그 공사를 포기하였다.
6 그러자 아사 왕은 온 유다 백성을 불러서,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할 때에 쓰던 돌과 목재를 가져 오게 하였다. 아사 왕은 이것으로 게바와 미스바를 보수하였다.
7 그 무렵 하나니 선견자가 유다의 아사 왕에게 와서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시리아 왕을 의지하시고, 주 임금님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셨으므로, 이제 시리아 왕의 군대는 임금님의 손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8 에티오피아 군과 리비아 군이 강한 군대가 아니었습니까? 병거도 군마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임금님께서 주님을 의지하시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임금님의 손에 붙이지 않으셨습니까?
9 주님께서는 그 눈으로 온 땅을 두루 살피셔서, 전심전력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이들을 힘있게 해주십니다. 이번 일에, 임금님께서는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임금님께서는 전쟁에 휘말리실 것입니다."
10 아사는 선견자의 이 말에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 때에 아사는 백성들 가운데서도 얼마를 학대하였다.
11 아사의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다.
12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이 되던 해에, 발에 병이 나서 위독하게 되었다. 그렇게 아플 때에도 그는 주님을 찾지 아니하고, 의사들을 찾았다.
13 아사가 죽어서 그의 조상과 함께 잠드니, 그가 왕이 된 지 사십일 년이 되던 해였다.
14 사람들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다. 그 무덤은 아사가 미리 파 둔 곳이다. 사람들은 향 제조법 대로 만든 온갖 향을 가득 쌓은 침상에 그를 눕혀서 장사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려고 큰 불을 밝혔다.
단순한 주제다.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면 평화가 오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이 온다는 말이다. 구체적인 실천 징표 행동은 우상을 불살랐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나 신을 없애는 것이 평화를 가져왔다는 말이다.
서두에 타종교를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성경은 타종교를 없애라고 한다. 단순히 생각하지 않고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타종교를 없애는 것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구절에 한정하면 불교 절에 가서 땅 밟기 하게 된다. 불상에 불 지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평화를 준다고 믿는 것은 하찮은 믿음이고 초보도 아닌 허망한 글귀에 매인 무지한 행동이다. 핵심 주제는 하나님을 찾고 그를 의지하는 것이라는 것이지 우상을 없애야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화가 생겨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기려는 단순 무식이다.
지난주 말씀 나눈 도교의 무위자연, 곧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도록 놔두는 것이 옳을 수 있다는,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말은 배울만 한 것이다. 이는 도덕경을 읽으며 인생을 반성하는 태도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계율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 신뢰하고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게 한다. 우상을 타파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우상을 없애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그를 의지하며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찾으면 찾고 버리면 버리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찾아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0515 #실제적인 하나님 섭리 #이사야서 46장 3~5절 (0) | 2022.05.10 |
---|---|
20220508 문제 있는 세상과 완전한 하나님 사무엘기하 22장 31~34절 (0) | 2022.05.03 |
20220424 무위자연(無爲自然) 마태복음 6장 25-34절 (0) | 2022.04.19 |
20220417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 #마가복음 12장 24-27절 (0) | 2022.04.12 |
20220410 고난주간에 요한복음 13장 1절 (0) | 2022.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