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블로그
20220612 #하나님의 일 #요한복음 9장 1-3절 본문
20220612
하나님의 일
요한복음 9장 1-3절
우리 사회의 차별은 분명히 있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부지불식간에 또는 무지해서 차별당하고 혜택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우나를 하러 갔더니 건물 옆 길에서 두 사람이 보루박스를 펴 놓은 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마 70대 중후반과 40대의 부자지간인 것 같았다. 그 옆에 폐지가 담겨있는 리어카가 있었다. 아들처럼 보이는 40대가 일어나더니 기우뚱 넘어질 듯하며 몇 걸음 걷는데 조금 가다가 다시 돌아와 그 자리로 넘어지듯 옆으로 벌렁 누웠다. 한참 동안 지켜봤다. 저들이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생활비와 의료비를 제대로 지급받고 있을까 했다. 저 정도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하는데 형편이나 무지로 인하여 저 상태로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했다. 그런 아들을 자기 운명이라 생각하고 데리고 사는 아버지가 안타까웠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니 말이다. 장애 자식을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 등산하는 사람, 수영장에 온 사람을 가끔 보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차별한다.
차별금지법이 논쟁 중이다. 여론은 다수가 찬성한다. 차별금지란 "자격이나 자질이 동등하거나 우월한데도 불구하고 성별, 인종, 출신지, 가족형태, 성적 지향, 병역, 학력, 장애 등의 사유로 고용이나 승진에서 불이익을 주거나, 누구나 누려야 할 교육, 의료 등은 물론 기타 서비스 업종에서 서비스의 제공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타당한 이유가 있을 때는 제외다.
기독교 보수 쪽에서는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집단 저항한다. 성경에 동성애는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선교에 방해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동성애자 차별 금지와 동성애 금지는 구분되어야 한다. 동성애 차별이 아니다. 편협한 사고에 의한 무비판적 행동이다. 물론 찬반에 관한 논쟁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날 때부터 성향이 남성이지만 여성적 성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드물게 있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날 때부터 지능 저하자도 있다. 그들을 데리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들을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법을 반대한다? 편협이고 무지다.
날 때 부터라는 말은 복잡하다. 어떤 사실이 유전이냐 환경이냐 아니냐 등등을 판단해야 하고,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못 한지조차 따져봐야 한다. 잘 살고 못 사는 문제를 비롯, 부자로 사는냐 가난하게 사느냐, 공부 잘하고 머리 좋게 났느냐, 행복하게, 평등하게 낳느냐 등등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물론 책임 여부도 관련된다.
장자크 루소가 1755년 출간한 책,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은 자연 상태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태어난 대로 존중되면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 수가 많아지고 재해가 생기고 사람이 동물들과 먹을 것을 가지고 다투면서부터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깨지고, 인간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인간 공동체가 형성되어 남을 상대화하고, 좋고 나쁨이 생겨 선악이 나타나 불평등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별이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사유 재산제도 "소유"를 타파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 질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혁명적이었다.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란 홉스의 주장에 반대하고, 디드로, 볼테르 등의 비판을 받았다. 이 책 이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대상으로 거짓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계약을 해야 한다며 "사회계약론"을 썼고, 이상적인 시민 교육 방법론으로 "에밀"을 썼다. 결과적으로 1789년 자유와 평등, 박애 슬로건의 프랑스 혁명 밑거름이 되었다. 앙시앙레즘(구체제-봉건 왕 군주제)이 붕괴되고 민주공화정이 시작된 계기를 만든 것이다.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민주주의 사회를 낳은 것이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는다.
로마서 2장 1~29절
1 그러므로 남을 심판(차별)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3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4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5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6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7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8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9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환난과 고통을 주실 것이요,
10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내리실 것입니다.
1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12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망할 것이요, 율법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입니다.
15 그런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
16 이런 일은,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17 그런데, 그대가 유대 사람이라고 자처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대는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간할 줄 알며,
19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하며,
20 지식과 진리가 율법에 구체화된 모습으로 들어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스승이요 어린 아이의 교사로 확신한다고 합시다.
21 그렇다면 그대는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22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23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24 성경에 기록한 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한 것과 같습니다.
25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그대가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26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그 사람은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27 그리고 본래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범하는 사람인 그대를 정죄할 것입니다.
28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29 오히려 속 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날 때부터라는 유전과, 사회적 관계에서 차별이라는 말씀 나눴지만 이 말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본문 요한복음 9장은 눈 먼 자를 눈 뜨게 한 예수님의 사역과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가치관, 그리고 평민들의 가치관이 얽혀 있는 문제를 다룬다. 차별, 죄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한다.
요한복음 9장을 살펴보자.
1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저능하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한다. 차별한다.
4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8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인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 하였다.
9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또 더러는 "그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10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11 그가 대답하였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12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된 사람에게 묻기를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하니, 그는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비뚤어진 바리새파 사람들
13 그들은 전에 눈먼 사람이던 그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
15 바리새파 사람들은 또다시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에 내가 눈을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말하기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였고,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표징을 행할 수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졌다.
17 그들은 눈멀었던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18 유대 사람들은, 그가 전에 눈먼 사람이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마침내 그 부모를 불러다가
19 물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당신의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20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21 그런데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가 자기 일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22 그 부모는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대 사람들이 이미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23 그래서 그의 부모가, 그 아이가 다 컸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말한 것이다.
24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멀었던 그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서 말하였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25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6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네게 한 일이 무엇이냐? 그가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하였느냐?"
27 그는 대답하였다. "그것은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말하였다. "너는 그 사람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29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30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31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
32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하였다는 말은,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33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34 그들은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바깥으로 내쫓았다.
참으로 눈 먼 사람
35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그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38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 절하였다.
39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말하였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집단이 정한 죄
기독교에서는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나누는데, 기독교의 죄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죄는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법(法, 다르마 dharma)에 어긋나는 일이다.
사전적으로 죄는 "법률 ·도덕 ·종교 등에 있어, 국가나 사회 ·교단(敎團)과 같은 집단이 규범(規範)으로서 인정하는 법칙에 어긋나고 그것의 결과로서, 규범을 위반한 사람에게 벌을 가하게 되는 행위나 태도의 일반적 명칭" 이다.
같은 죄도 죄가 아닌 것이 있고, 죄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 것이나, 도로에서 차량 사고로 인하여 사람이 죽었을 때도 살인이라고 하지만, 같은 살인도 전쟁에서 상대를 죽이는 행위나 살인한 자를 사형으로 처벌하여 죽이는 행위 등은 죄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죄는 인간 집단이 규범으로 정한 것을 위반한 것일 뿐이다.
예수님은 죄를 무시한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 사람 자신의 죄도 아니라고 하며,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나님의 섭리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만든 죄를 무시한다. 죄로 사람을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법은 결과적으로는 애매하다.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죄를 제대로 이해하면,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면 별 거 아니거나 또는 판단이 어렵다.
인간 차원이 아닌, 인간은 이해하기 어렵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일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이 알 수는 없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저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문제를 신인 하나님 차원으로 돌려 표현하고 있다. 죄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 차원을 넘어 신인 하나님께 돌린 것이다.
동성애자가 아닌 대다수 일반인은 동성애자를 이해하기 어렵다. 애매하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도 이 세상 사람이라는 것이다. 질병이 존재하는 것, 사고가 발생하는 것, 심지어 사람이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다는 것 등등 세상 수많은 것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우리 영역이 아닐 수 있다.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하여 일 하신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것들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믿고 하나님 안에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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