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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9 #예루살렘 입성 #마가복음 11장 1-11절 본문
20230319
예루살렘 입성
마가복음 11장 1-11절
오늘은 마가복음 11장이다.
예루살렘 입성(마 21:1-11; 눅 19:28-40; 요 12:12-19)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면서 마지막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갈릴리 타보르산과 갈릴리 호수, 그리고 그 호수 근처 디베랴, 가버나움, 벳새다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나사렛에서 138km 떨어진(하루 4시간 걸어서 일주일 정도 30시간, 차로 2시간 거리, 대략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까지 거리다.) 유대 벳바게와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 거기서부터 약 2km 거리의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갈릴리 지역에서 유대 지역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간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야 한다. 다른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를 비롯 몇몇 사마리아 지역에서의 선교 기사가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사마리아 선교 기사가 없다.
마가복음은 한 번, 요한복음은 세 번 예루살렘에 간 것으로 나온다. 요한복음 4장 40절에 의하면 거꾸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면서 최소 2일 동안 사마리아에 머물렀다. 본래 유대인들은 1년에 세 번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입성에 관한 기사는 구약시대 예언된 제사장이자 예언자이며 왕으로써의 메시아가 세상에 나타나 나귀 타고 군중들 환호 가운데 그의 자리인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는 기사 기록이다.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리는 행사였다.
<참고>
베타니(베타니아,알아이자리야, Bethanyal, AL-Eizariya)는 예루살렘 외곽, 올리브 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1949~67년에는 요르단령이었으나 1967년의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해 웨스트뱅크(유대아와 사마리아)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베타니는 신약성서에 자주 언급되어 있다. 이곳은 마리아와 마르타, 그들의 오빠인 라자로의 고향이며 예수가 죽은 라자로를 살린 기적이 일어난 곳이다(요한 11). 아랍어 이름인 알아이자리야는 라자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또한 문둥이 시몬의 고향으로(마태 26, 마르 14),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나온 뒤 묵었던 곳이며(마태 21:17), 부활한 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헤어진 곳이기도 하다(루가 24:50~51). 베타니에는 이 지역에서 존경받던 라자로의 지하무덤을 비롯해 전통적인 성지가 많다. 3세기부터 교회가 건설되기 시작했지만 대부분 폐허가 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전통성지들은 복음서에 근거해 지정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다.(출처 : 다음백과)
베타니아(아람어: בית עניא; Beth anya, "비참한 사람의 집"), 알에이자리아(al-Eizariya)는 신약성경에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형제와 문둥병 환자 시몬의 마을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 전날 묵었던 곳이며 부활 후 승천할 때 제자들과 헤어진 곳이기도 하다. 베타니아는 전통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2km 떨어진 올리브산 남동쪽 자락에 있는 요르단 강 서편의 알에이자리아로 알려져 있다.(출처 : 위키백과)
1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3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 하고 물으면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4 그들은 가서, 새끼 나귀가 바깥 길 쪽으로 나 있는 문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었다.
5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새끼 나귀를 풀다니, 무슨 짓이오?"
6 제자들은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7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올라 타셨다.
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10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무화과나무 저주(마 21:18-19)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를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13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다음 구절은 성전 청결 기사지만 20절로 넘어가 읽는다. 마태복음은 연결되어 기록되었다.
마른 무화과나무(마 21:20-22)
20 이른 아침에 그들이 지나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버린 것을 보았다.
21 그래서 베드로가 전날 일이 생각나서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자연현상을 통제하는 예수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하나님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하 말씀은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자연현상조차 그 믿음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어서 단순히 인간들 사이의 신뢰 이상의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확실히 믿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문자대로 믿고 산을 옮길 믿음을 갖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극단적 목표로 삼을 수는 있지만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말씀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극단적인 신적 믿음이 아니고는 백날 산 더러 바다에 빠져라 해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도 할 때의 자세와 마음 가짐에 관한 말씀이다.
2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라.
2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기도할 때의 마음 가짐에 대하여 25절은 인간관계에 관한 위대한 말씀인 용서하라고 하고 있다. 용서하라는 인간을 이해한 하나님의 심경이고 인간의 바람이지만 현실에서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용서는 인간적으로는 사죄를 전제한다. 가해자의 진정한 잘못에 대한 뉘우침이 있었을 때 가해자 자신도 그와 관계된 사람들도 억눌린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두환이 사죄하고 죽었으면 그 자녀, 전도사가 되었다는 전재용, 전두환을 고발하고 비자금을 폭로한 손자 전우원이 그렇게 눌리어 도피하며 음지에서 살지 않았을 것이다. 가해자를 용서해도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으면 억눌려 살 수밖에 없다. 물론 용서한 사람은 가해자의 회개 유무와 무관하게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을 편하게 만든다.
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26절 없음)
성전 청결(마 21:12-17; 눅 19:45-48; 요 2:13-22)
예수님은 장사치들의 장사하는 곳이 되어버린 성전을 본래 목적에 맞게 기도하는 집,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하며 성전 청결을 행하신다. 이에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지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군중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없애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게 된 원인이 성전 청결 사건이다고 한다.
저녁때가 되면 예수님은 성전에서 나와 베다니에 가서 묵었다. 앞서 말한 대로 베다니는 다른 복음서에서 기록된 대로 나사로를 살리고 예수님께 호의적으로 대한 지역이었고 제자들과 헤어지며 승천하신 곳이다.
15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6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
17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18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는, 어떻게 예수를 없애 버릴까 하고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가 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 저녁때가 되면, 예수와 제자들은 으레 성 밖으로 나갔다.
예수의 성전 청결 권한(마 21:23-27; 눅 20:1-8)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 성전에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성전 청결을 했느냐고 따진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은 무슨 권한으로 했겠느냐고 묻는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암시하며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한 것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전이 자신의 소유이니 자신에게 성전 청결 권한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고 사람들의 지지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요한이 세례 준 것이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아 백성들로부터 지지받고 있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아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그들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장로들은 마치 윤대통령이 국민들로부터 지지받지도 못하면서 자기 맘대로 자기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친일 언사와 외교를 하는 것과 같이 행동했다. 성전 청결 권한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착각하듯 강제 동원 해결 권한은 국민들로부터 피해자로부터 주어지는데 대통령은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한다. 일본이 사죄하지 않은 가운데, 피해자들이 지지하지 않는 가운데 일본과 관계 개선을 하겠다니 대통령의 독선이다.
마가는 그들 예수님을 죽일 이유를 명분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음을 말하고자 당시 있었던 일을 기사화하여 로마 폭정으로 죽어가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순교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27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거닐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예수께로 와서
28 물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성전 청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까?"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으니,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내게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며 말하였다.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다.
32 그렇다고 해서 '사람에게서 왔다'고 대답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들은 무리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무리가 모두 요한을 참 예언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3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예루살렘은 유대의 수도이자 성전이 있는 곳이다. 제사장, 예언자, 왕이 이곳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곳에 예수님이 올라가셨다는 것은 유대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라도와 같은 갈릴리에서 3년 사역을 하고, 서울 같은 예루살렘에서 그의 마지막 일주일 사역을 행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 살도록, 생명을 구하려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고 지지하며 따랐지만, 그를 잡아 죽이려던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리고 부활하여 승천하였다. 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은 희망을 갖는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하며 고난 받는 로마교우들에게 주는 메시지였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날마다 희망을 갖고 활기차게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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