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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7 #하나님의 자비 #로마서 9장 15-18절 본문
20240317
하나님의 자비
로마서 9장 15-18절
오늘은 로마서 9장이다.
1995년 부터 글로 남아 있는 설교문은 1997년부터 현재까지 대략 25년 1,311회분이다. 그중 로마서 9장을 본문으로 9번 설교했다.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요약해 참고하고 오늘 말씀을 나눈다.
현대 불신 과학자 다니엘 데닛(Daniel Clement Dennett III)과 샘 해리스(Samuel Benjamin Harris)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고 했다. 이들은 오직 유전자 DNA와 감각 기관에서 받아들인 정보가 뇌로 전달되고 뇌에서 판단을 하여 명령을 내리는 신경세포체 뉴런과 호르몬에 의하여 인간은 행동하고, 그리고 환경의 영향 하에 있다고 한다.
반면 고대 철학자 플라톤(Platon)이나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등은 인간 인생은 인간 자신의 행동과 의사 결정을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인, 협의로 보면 자유의지가 있지만, 광의로 보면 결국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따라 전개된다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를 종합하여 25권으로 우리말 번역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요약한 "신학요강(Compendium Theologiae)"에서 자연은 이치에 따라 목적대로 있는 것이고, 인간은 이성과 감성(본능)에 의해 목적과 의지대로 산다. 신은 자연의 필연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성과 의지를 통해 사물들이 존재하도록 산출했다.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헛되게 존재하지 않고, 목적 때문에 가장 좋은 상태로 존재한다. 모든 것은 신의 신성과 닮기 위한 이유 때문에 만들어졌다. 지성적 피조물의 궁극 목적은 본질에 따라 신을 보는 것이다. 영광의 빛을 통하여, 곧 신의 빛 안에서 빛을 본다. 오직 신만이 인간의 의지를 움직인다고 했다. 깔뱅(Jean Calvin 존 칼빈 John Calvin 주앙 코뱅 Jehan Cauvin)은 인간 의지의 자유는 선택의 자유이고, 그 선택의 자유는 결국 하나님의 자유 의지에 따른다고 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곧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적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 곧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고 인간이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감성과 이성과 의지로 살아간다. 감성은 5감각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감성은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이다. 철학적으로는 이성(理性)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외계의 대상을 오관(五官)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표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다. 이성은 그 감각에 의하여 인식된 것을 정리하고 판단한다. 그런데 칸트(Immanuel Kant)는 그의 글 "도덕론"에서 "감성은 욕구 또는 본능을 가리키며, 그것은 이성에 의해 억제될 수 있다. 의지는 그 감성과 이성에 의하여 경험된 것들을 이끄는 작용이다"고 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건 없건 간에 인간은 선택 상황에 놓여 있다. 현실의 속에서 선택하며 산다. 어떤 결정을 하며 산다. 선택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런데 그런 선택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치에 맞추어 이루어지고 이루어져야 하고 자유로운 가운데 의지가 발동된다. 쉬운 말로 내 맘대로지만 맘대로라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합당한 이유가 있다. 자유한 가운데 뜻이 있어 타당한 이유가 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무작정 한 것이 아니다. 무한한 변수들이 있어 그 중 하나를 결정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다. 오늘 교회에 간다고 결정하여 행동한다. 다 이유가 있다. 어쩔수 없이 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가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습관적인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다 내 맘이다. 이치에 맞게 자유와 의지에 따라 결정하며 산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맘대로 사람들에게 역사하신다. 이치에 맞게 자유로 하나님 의지대로 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을 위하는 것이고 인간이 즐거워하는 것이다.
로마서 9-11장은 유대인의 율법과 이방인의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 유대인의 잘못으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옮겨가 이방인을 구하고 종래에 유대인도 이방인으로 인해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섭리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만인구원설이 나온다. 모든 인간을 구원받는다는 말이다. 의심이 들 수 있다. 그러면 뭐하러 믿음생활 하는가 하지만 그 이상은 우리 인간 한계로 다 파악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택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3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4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5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6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7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다만 "이삭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너의 자손이라고 부르겠다" 하셨습니다.
8 이것은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참 자손으로 여겨지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9 그 약속의 말씀은 "내년에 내가 다시 올 때쯤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한 것입니다.
10 그뿐만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수태하였는데,
11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이라는 원리를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이 살아 있게 하시려고,
12 또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셨습니다.
13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14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17 그래서 성경에 바로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너를 세웠다.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자비에 따른다. 하나님 맘대로 하신다. 특별히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다.
자녀들을 가르칠 때도 맘대로, 하지만 계획과 뜻이 있는 선택을 하여 여러가지 고려하여 하되 제대로 살게 한다.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완악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신다.
재산이 있는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무모 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는 물려준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물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사회에 기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자식이 부모에게 불만을 품고 왜 안 물려주냐고 항의할 수 있는가? 부모님 마음이다. 일반적으로는 보통 부모는 자손이 많아지기를 바라고 더 잘 살라고 물려준다. 자신이 자녀 속에 유전자로 남아있어 자녀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부모 자신이 자녀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자비
19 그러면 그대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20 오, 사람아, 그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21 토기장이에게,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22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을 보이시고 권능을 알리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멸망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대상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시면서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23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자비의 대상들에 대하여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리시고자 하셨더라도, 어떻다는 말입니까?
2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유대 사람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25 그것은 하나님이 호세아의 글 속에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라고 하겠다. 내가 사랑하지 않던 백성을 '사랑하는 백성'이라고 하겠다."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27 그리고 또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28 주님께서는 그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그리고 조속히 온 땅에서 이루실 것이다."
29 그것은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따랐지만 율법을 행하지 낳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불의한 행위를 따랐기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졌고 죄인으로 인식한 이방인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이뤄 구원을 얻었다. 이스라엘은 제 잘났다고 했고 이방인은 자신의 불찰을 인정한 것이다.
이스라엘과 복음
30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32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33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보기에는 사람은 다 비슷비슷하다. 하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자비를 입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인생은 다르다.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환경에 의하여 선택하며 산다. 믿는 사람은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그저 자연적으로 살 뿐이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옷입어 하나님 자비로 살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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