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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16 제목 : 능력의 원천 성경 : 사도행전 23장 1-11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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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16 제목 : 능력의 원천 성경 : 사도행전 23장 1-11절

필명 이일기 2018. 12. 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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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16

제목 : 능력의 원천

성경 : 사도행전 231-11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훤화가 일어날쌔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서론

여러분 아비규환이란 말과 아수라장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불교 용어입니다. 아비규환은 - 지옥 중에서도 고통이 가장 심한 곳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참상)을 말하고, 아수라장은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의 싸움터를 말합니다.

지난 대구 지하철 화재 시 그 속에서 사망하거나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경험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고들 합니다. 호랑이가 잡아가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찾은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어려운 때 그 어려운 것들을 빠져 나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합니까? 그러나 한편 내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오기가 어려운 지경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가운데 바울은 무엇으로 인하여 그의 고난 속에서도 그 고난을 견디어냈는가를 봄으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참고자료)

아비규환<(언덕)(코비)(울부짖을규)(부를환)>

- 지옥 중에서도 고통이 가장 심한 곳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참상)

아비(阿鼻)와 규환(叫喚)은 모두 불교에서 말하는 8대 열 지옥의 하나다. 지옥 중에서도 고통이 가장 심한 곳이다.

아비는 범어 'avici'의 음역으로 아는 무(), 는 구()의 뜻이다. 그것은 '전혀 구제 받을 수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 이것은 8대 지옥 중 가장 아래에 있는데 고통이 잠시도 그칠 날이 없다해 무간지옥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떨어지면 옥졸이 죄인의 살가죽을 벗기는가 하면 그 벗긴 가죽으로 죄인(罪人)을 꽁꽁 묶어 불수레에 훨훨타는 불속에 던져 태우기도 한다. 또 야차(夜叉-악마)들이 큰 쇠창을 불에 달구어서 지지고 입, , , 등을 꿰어 던지기도 하며 쇠로 된 매가 죄수의 눈을 파먹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하루에 수천번씩 죽고 되살아나는 고통을 받게 되는데 잠시의 평온도 누릴 수 없다. 고통은 죄의 대가를 다 치른 후에야 끝난다.

叫喚'울부짓다'는 뜻이다. 역시 범어 'raurava'에서 유래된 말로 8대 지옥중 네번째 지옥인데 누갈(樓喝)이라고 음역하기도한다. 이곳엔 전생에 살생, 질투, 절도, 음탕, 음주를 일삼은 자들이 떨어지게 되는데, 물이 펄펄 끓는 거대한 가마솥에 빠뜨리거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쇠로 된 방에 들어가 뜨거운 열기에 고통을 받아야 한다. 워낙 고통스러워 규환지옥이라고 한다.

이렇든 아비규환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지옥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는 참상을 두고 아비규환(阿鼻叫喚) 같다고 표현한다.

아수라장<(언덕아)(닦을수)(비단라)(마당장)>

-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의 싸움터

아수라(阿修羅)는 범어(梵語) 'asura'의 음역(音譯)이다. 약칭 수라라고도 하며 또 아소라(阿素羅), 아수륜(阿須侖)이라고도 하는 '추악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수미산(須彌山) 아래 거대한 바다 밑에 살며 수억 만리나 되는 크기에다 수백억년이나 장수하는 귀신이다. 모습도 흉칙하기 그지없어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개다. 본디 그는 착한 신이었는데 후에 하늘과 싸우면서 악신(惡神)이 됐다고 한다.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전신(戰神)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호전성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보면 비슈누신의 원반에 맞아 많은 피를 흘린 아수라들이 다시 칼, 곤봉, 창으로 공격을 당해 피에 물든 그들의 시체가 마치 산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나 처참한 광경을 일컬어 아수라장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정의의 상징인 하늘과 싸우기도 한다. 이 때 하늘이 이기면 풍요와 평화가, 아수라가 이기면 빈곤과 재앙이 온다고 한다. 그 승패를 갈라놓은 것은 인간들이다. 곧 인간이 선행을 해 이 세상의 정의가 널리 행해지면 하늘의 힘이 강해져 이기게 되지만 반대로 못된 짓이나 하고 불의가 만연(蔓延)해 있으면 아수라의 힘이 세져 하늘이 지게 된다. 아수라를 물리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선행을 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룰 때 악의 상징인 아수라는 발을 못 붙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도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본론

본문의 배경인 당시 사도행전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절한 여건 속에서도 복음전도의 일을 엄청나게 이루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안에서는 당시의 집권층인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인 그 잔인한 태도로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하여 온갖 핍박을 서슴지 않고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제국의 박해가 성난 파도처럼 기독교를 덮치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다신교에 황제숭배를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다양한 신들을 믿는 다신교 국가였고 황제를 숭배하도록 하였지요.

그러나 당시 기독교는 예수가 하나님이시며 그분만이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라고 고백하며 여타의 모든 신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거대한 로마제국으로부터 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유대교와 로마제국에 맞설 만한 무슨 능력이나 세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 있던 제자들이란 마치 거인 골리앗 앞에 선 다윗 같고, 애굽의 바로 앞에 선 모세와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진 여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초인적인 복음전도의 일을 해냈고, 결국 유럽 세계를 기독교의 품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기적적인 일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가? 그 힘과 능력의 원천은 어디 있었는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의 믿음은 크게 세 가지 첫째가 부활에 대한 믿음, 둘째가 확신에 찬 성령 충만한 믿음, 셋째가 예수재림 대망의 믿음이다. 그들의 폭발적인 믿음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 셋째에 관한 말씀은 다음주, 그 다음주에 말씀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 사도들의 신앙이었고 힘의 원동력이었으며 바울에게도 그러한, 부활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말씀 나눕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것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내세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다윗의 왕국을 회복하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를 지배할 분으로 알고 따랐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와 더불어 세속적 영광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충만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믿고 따랐던 예수는 십자가 형틀에서 허망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히고 돌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의 부푼 소망도 죽어 땅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풀이 죽었고 죽음의 위협에 휩싸여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으시고 장사된지 3일이 지나 부활하셔서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20:19).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목격했으며 그분의 손과 옆구리의 못과 창 자국을 확인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 후 40일 동안 여러 번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일을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다시 소망과 용기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복음전도의 사명을 분부하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1:2-4,9).

예수께서 죽으신 후 제자들은 모든 것이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믿음과 소망과 용기가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삶과 가치관은 과거의 것에서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세상적인 믿음에서 예수 중심적이고, 영적인 믿음으로 엄청난 질적 변화를 하였습니다. 두려워 떨며 숨어 지내던 그들이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비록 적은 숫자요 배움도 세력도 없었지만 핍박과 죽음의 위협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 세력이었던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등에게 맞서서 당당히 예수의 부활과 구주이심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살아있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그들 앞에서 예수를 전한다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마치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무모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나서 그들도 예수를 믿고 죽는다면 예수의 말씀처럼 죽어도 다시 살뿐만 아니라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 영원히 예수와 함께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1:25-26). 이러한 영광스러운 소망이 가슴에 터질 듯이 솟아올랐기 때문에 많은 핍박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용감히 예수의 부활과 구주되심을 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4:10-12,5:40-42).

특히 바울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하고 나서 극적인 변화를 받아 부활신앙에 심취하여 그의 생애를 온전히 예수의 부활과 구주이심을 전하는 데 바쳤습니다(9:1-9). 바울 사도는 본래 바리새인으로서 유대교에 철저한 사람이었고 예수를 이단으로 알고 예수를 믿는 사람을 박멸하는 것을 하나님을 위한 길이요, 따라서 그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확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했고 헬라 철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습니다(3:5-6,17:18). 그는 학문이 많고 머리가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의 부활을 믿고 그토록 증오하며 박멸하고자 했던 예수를 전하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무엇이 바울을 그렇게 극적으로 변하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부활을 전했으며 심지어 그로 인해 미쳤다고 조롱까지 받았습니다(13:29-30, 26:23-24). 그는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생생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고)

첫째, 부활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것입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둘째, 예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었고 바울 자신도 목격한 사실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 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셋째,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12-19).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넷째, 부활 후에는 반드시 영광의 몸이 있을 것입니다(35-41).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도다

다섯째, 예수 재림 때 홀연히 변화하여 썩지 않을 몸을 입을 것입니다(50-57).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여섯째, 그러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의를 행하고 충성을 해야 합니다(30-34,58).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 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바울 사도는 이러한 예수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변화를 받을 수 있었고 그의 삶을 남김없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일 설에 의하면 그는 로마에서 네로 황제 때 장렬하게 순교당했다고 합니다.

본문은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바울의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정에 서고, 감옥에 갔고, 로마에 가서 증거하며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바울 사도를 통하여 부활의 신앙이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확실치 못한 신앙은 마치 기초 없는 집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부활을 목격하지는 못했으나 제자들의 변화와 생명을 건 활동과 또한 그들의 주장이 기록된 사도행전 등을 읽으며 우리의 신앙을 부활의 신앙으로 다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을 부인한 도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부활을 목격할 수 없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부활을 목격한 것처럼 믿고 삶의 변화와 복음전파와 주님의 몸된 교회에 충성할 것을 권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참고 간증)

저는 과감하게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장병호 목사

(서울대학교병원 병원교회 원목으로 사역하면서 많은 환우와 보호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내일 아침 8시부터 시작하는 병원 수술 스케즐을 보면서 두 번째 순서로 수술 받을 환우를 만나려고 정형외과 병동 0000호실 문을 노크하고 조용히 들어선다. 들어서자 찾으려던 000 환우의 이름이 오른쪽 벽면에 선명하게 나타난다. "000! 저는 병원교회 목사입니다. 내일 오전에 000교수님에게 수술 받으실 계획이 있으시죠?" 하고 말을 건네니 미동도 없이 병상에 꼿꼿이 누워있는 상태로 고개를 끄떡이면서 "!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하고 낭낭한 목소리로 응수하는 폼이 어째 예사롭지 않다. "!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수술 스케줄을 가지고 있으니 알지요. 혹시 두렵겠지만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수술 잘 받도록 하세요! 000! 혹시 예수 믿으세요?"하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잠시 머뭇머뭇 하더니 원한에 가득찬듯한 앙칼진 목소리로 엉뚱한 대답을 한다.

"과거에는 잘 믿었었는데 몇 년전에 저는 과감하게 예수님을 버렸습니다."라고 당당하고 뻔뻔한(?) 어조로 말하면서 특히 "버렸습니다"라는 단어에 굉장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역으로 호기심이 더 크게 발동하였다. 그래서 침상 곁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다가서면서 "! 그래요? 참 잘하셨네! 그동안 사시면서 힘든 일들이 참으로 많이 있었나 봅니다?"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가니 "! 그 말씀이 맞아요! 하나님은 어째서 저같이 양심적으로 바르게 열심히 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이렇게 불행한 일만 몰아다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좋은 일은 한 번(?)도 주시지 않기 때문에 제가 예수님을 버렸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억양이 높아지며 분노가 더 심해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정말 하나님이 굉장히 원망스럽게 생각되셨을 것 같군요?" "목사님! 생각해보세요. ? 하나님이 저에게만 이같은 끔직한 어려운 사건들을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멀쩡하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당한 사고로 결국은 장애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한 처사입니까?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만 해요. 누구를 믿을 수가 없어요."(대화 중략) "그래도 000씨는 보고 싶은 것 다 볼 수 있지요. 느낀 감정으로 하고픈 이야기 모두 말할 수 있지요?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갈 수도 있지요! 먹고 싶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마음대로 골라 먹을 수 있으니 이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합니까? 000씨 같은 처지라면 우리 병원에서는 환자 취급 받기도 쉽지 않을 걸요? 더 심한 표현을 한다면 아마 환자축(?)에 들기도 어려울지 모르죠? 왜냐하면 이 병원에는 그만큼 제 몸 하나도 스스로 가누기조차 힘든 중환자들 특히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암환우들이 참으로 많다는 말이죠." "저도 그런 상식쯤은 잘 알고 있어요. 사실 내 처지가 다른 이들보다 몇 배나 좋은 조건이라는 사실을 저 역시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내게 대하여 너무하시는 것 같애요. 저는 어릴 때부터 엄마 얼굴도 모른체 자랐으며 조금 철 들려고 하니까 그 때부터 저에게 가해진 욕은 '엄마 잡아 먹은 년, 너도 죽어버려.' 라는 심한 구박을 받고 자라났어요."(눈에 눈물 방울이 맺힌다.)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 보니 000씨는 14녀 중에 막내로 태어(1968)났다. 불행의 시초는 000씨가 세상에 태어난 지 2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자궁암으로 오랜동안 고생하신 후 돌아가셨다. 그런데 어렸을 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기 시절부터 언니들이 자기에게 하던 말 중에 유난히 기억되는 말들은 "너 때문에 우리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어! 이 웬수야!" "죽은 엄마를 살려 내!" 라는 등의 폭언과 구박을 받아야 했고, 엄마 없는 설음위에 원망과 푸념으로 뒤범벅이 된 욕설과 잔소리를 늘 듣고 하루 하루를 살아야 했다. 말하자면 성장하면서 육체만 자란 것이 아니라 그 어리고 여린 마음 속에서는 계속 분노와 미움과 적개심도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모든 이들에게 당한 것 만큼 꼭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항상 그 마음 속에서는 예리한 비수를 갈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성품은 조금 거칠어 보였고, 마음 속에는 기쁨과 평안함 보다는 매사에 매우 도전적이며 부정적인 성격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얼굴에도 겉으로 표출되는 모습이 마치 독기가 서려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둡고 신경이 예민해 진 모습을 가지고 생활해야 했다. 그래서 병실에서도 의사나 간호사의 말에 고분고분하는 성격이 아니고 늘 도전적이고 반항적일 수 밖에 없었기에 잠시만 입원해도 곧 문제의 환우로 낙인 찍힐 정도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누구든지 그의 감정을 건드리기만 하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시한 폭탄을 가슴에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은 무서울 정도의 독한 감정으로 가득차 있다고 한다. 000씨는 12년전에 일찍 결혼하여 젊은 가정 주부로서 남편과 두 자녀의 엄마가 되어 남편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아들 딸 네 식구가 행복한 가정 공동체 안에서 단 꿈을 꾸면서 오붓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날인 1998년 어느날 교통사고로 인하여서 경추(목부위)부분의 뼈를 네 개나 다치면서 전신마비까지 와서 의식을 완전히 잃게 되었고 중환자실에 오래동안 입원하여 있었지만 여러 번에 걸친 수술로 인하여 지금은 오른쪽 다리와 손이 마비 상태에 있어 만져도 감각이 없는 상태이고, 왼쪽 팔 다리는 걸을 수 있는 힘은 있으나 절룩거리는 상태가 되었다. 손도 여러 번의 수술을 거치면서 매우 호전되기는 했지만 오른쪽 손은 전혀 쓸 수 없고, 왼쪽 손목 근처의 뼈가 너무 자라기 때문에 뼈를 갉아 내는 수술도 받아야 했다. "000씨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사랑도 못받고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네요." "저는 어렸을 때에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랐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와 분노와 적개심이 계속 누적되어 하늘 높은 줄 모를 정도로 쌓여 있었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험악한 세상에 살면서 마음의 크고 작은 상처를 종종 받을 수 있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그 분이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시잖아요?"(대화를 하는 도중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도 거부 반응이 없다.) "사람들이 흔히 말 하지요?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처럼 고난을 당한다고요. 목사님! 아마 제가 전생에서 큰 죄를 지었나보죠?" "예수 믿는 사람이 별 소리를 다 하네요. 그래서 우리가 해결하지 못할 그 모든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셨잖아요! 그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죠!" "그전에는 잘 믿었지요! 저는 오늘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보나마나 뻔하거든요?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거예요."(마비된 신경이 되살아나기 힘든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얕은 생각은 한낱 000씨의 개인적인 기우일 뿐이죠. 000씨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과 미래의 계획은 엄청나게 다를 수도 있지요?" "저는요. 그동안 너무 힘들어서 '에라 모르겠다 이 한 생명 죽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자살 시도를 몇 번이나 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죽지 못한 이유는 이 세상에 남겨질 두 자녀를 생각하면서 '저 아이들도 나와 똑같은 상황에서 엄마 없이 자라면서 누구에겐가 심한 구박을 받으면서 살겠지!' 하며 생각하니까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지금까지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겁니다." "그렇지요. 000씨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지요. 귀여운 자녀들이 있지요. 그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겠어요? 자기 혼자만 편하려고요?" "사실 저는 자식들 때문이라도 정말 죽을 수 없었어요."(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래요 온전하였던, 아니 건강하였던---, 건강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 만만하였던 사람이 한 순간에 불편한 몸이 되어 버렸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팠겠어요. 저라고 해도 충분히 하나님께 원망하구 말구요." 이렇게 대화가 진행되는 순간에 그녀의 얼굴 모습이 좀 더 진지하면서도 숙연해 지며 조금은 안정을 찾는 듯 싶어 보였다. 그녀는 다시 작은 목소리로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안들어 주시고---"하면서 목메인 소리로 말문이 막히며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낀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어려움 당할 때 더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34:18)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예수님을 모시고 마음을 안정시키세요. 마음이 안정되어야 수술도 제대로 받을 수 있지요.(점점 그녀의 얼굴에서 분노와 노기에 찬 모습들이 서서히 떠나가면서 잔잔히 미소짓는 예쁜 얼굴로 변해간다.) 그 때에 "우리 함께 기도 할까요?" "아뇨! 기도 드려봐야 무슨 변화가 있겠어요? 수술해도 그냥 마찬가지고 저는 영원한 장애인인 걸요." "우리 병원에 매주 금요일마다 전도하러 오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있는데 어렸을 때 꿈이 축구선수였는데 그 꿈을 펼치지 못하고 그만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었고, 특히 목 부분 이하는 완전 마비상태여서 아무런 감각이 없다고 해요. 그가 말하기를 제일 무서운 것이 개미들이라고 해요. 왜냐하면 개미가 달라 붙어서 자기 살을 뜯어 먹어도 감각이 없기 때문에 모를 정도로 마비되었는데, 그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입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의 활동을 하는 분이 있어요. 000씨는 자신의 마음만 한 번 바꾸면, 아니 의식만 바꾸면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네요." "남들은 다들 답답하고 남의 속 터지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 하면서 저를 위로해 주려고 무진 노력을 하지요. 그러나 뭐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부분이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우리가 잘 아는 소설가 박완서씨는 남편을 사별한 뒤 불과 1년도 안되어 미래가 창창했던 26살의 마취과 전문의 과정 중에 있던 외 아들이 죽자 발작하다시피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증오하였지만 그녀가 나중에 상처가 어느정도 아문 다음에 고백하기를 나의 투정과 심술을 받아 주실 하나님이 계신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만약 고통 받을 그때에 그 하나님이 안계셨더라면 나는 아마 미쳐버렸을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저도 오늘 이처럼 된 것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네요." 하면서 000씨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제가 다시 하나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도록 노력할께요."너무나도 급진전 되어간다. "참 잘 생각하셨어요. 믿음이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소유하는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지체하지 마세요." 000씨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강하게 원망하고 욕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마음속 깊은 내면에서는 아직도 그르터기 믿음이 떠나지 않았었고, 하나님께서도 000씨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에 그대로 차지하고 계신 줄 믿는다. 역시 가장 강한 부정은 가장 강한 긍정을 전제하고 있는가 보다. 이틀 후에 다시 병실을 찾으니 그녀가 벌떡 일어나서 반색을 하며 맞이해 준다. 너무도 상냥한 모습으로 변하였다. 의자에 가까이 앉아 대화를 나누며 더 자세한 인생과정을 들으니 그녀는 이제껏 사랑을 모르고 살았기에 짧은 인생이지만 불평과 원한과 미움과 복수심이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며 불타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이웃이라는 개념은 모두가 원수요. 해롭게 하는 속물들이요. 속이고 사기치고 이용해 먹으려는 불량한 사람으로만 이해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슴에 이처럼 혈압을 높히는 위험 수위까지 오른 분노, 미움, 복수심, 저주로 가득차 있는 동안 그 육체인들 하루도 편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의 미움이 사랑으로만 변화가 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리라 분명히 믿는다. 다행히도 두 차례에 걸친 그녀와의 대화는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 싶었다. 사람을 만나서 웃을 수 있었고, 구사하는 단어들이 도전적이지 않았고, 미움 분노 복수심이란 단어보다는 사랑, 평안, 이해 등으로 변하였다. 퇴원을 앞두고 마주 앉았을 때에는 먼저 기도를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그녀의 양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니 첫 번 만났을 때 보다는 더 큰 소리로 아멘하면서 또 다시 눈에서 계속 흘러 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느라고 빠쁘더라.

 

결론

부활신앙은 믿음의 원천이고 기초입니다. 이 신앙으로 세상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현실의 어려움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여러분은 부활의 소망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소망이고 도움이며 인도자가 되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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