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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6 #완전한 사랑과 자비 #마태복음 5장 38-48절 본문
20210606
완전한 사랑과 자비
마태복음 5장 38-48절
1. 참혹한 사건 사고들이 많은 세상
요즈음 뉴스는 전쟁 상황도 아닌데 별나게도 참혹한 사건들이 많이 보도된다.
요즘만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 현실이다.
사람들은 복잡한 사건은 완벽하게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문제 있는 사람을 끝까지 온전하게 대하지 말라고 한다.
그냥 넘어가라고,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대충 그러려니 하고, 그런 사건과 사람을 그런대로 대하라고 한다. 모자란듯 살라는 말이다.
세상을 완벽하게 살려고 하면 자신도, 다른 사람도 모두 짜증나고 피곤해지며 스트레스 받기 때문에, 그리고 완벽하게 살 수도 없기 때문이란다. 그것이 지혜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많은 곳에서 (새번역)완전, (개역개정)온전하라고 한다.
마태복음 5장 48절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하라는 것이고, 하나님은 온전한 마음을 바란다는 것이다.
특히 히브리서에서 완전, 온전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히브리서 10장 14절은 "그는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사실 완전, 온전하라는 말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2. 실존주의 키에르케고르
실존주의는 키에르케고르 저작들이 1, 2차 세계대전 중에 조명되어 등장하는 철학적 가치관이다.
전쟁의 참혹하고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실존주의 성격의 문구, "인간은 세계에 던져져 있다."(전투성)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어구,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현실을 사는 인간이 본래의 인간보다 더 우선하고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보이는 실존이 오히려 본질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현재 보이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내면보다 더 진짜인 그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보이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말이다.
쇠렌 키에르케고르, 칼 야스퍼스, 마르틴 부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칼 융, 프란츠 카프카, 가브리엘 마르셀, 프리드리히 니체,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트 카뮈, 모리스 메를로 퐁티, 시몬 드 보부아르, 앙드레 말로 등등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생(Søren Kierkegaard, 1813 년 ∼ 1855 년 )과 사상
키에르케고르 아버지 미카엘은 젊은 시절 가난하여 신을 저주했다. 또한 결혼 2년만에 부인이 죽자 교회법(아버지는 충실한 루터교인이었다. 성경 문자적인 해석에 의한 법)을 어기고 하녀 쇠렌 스대더 룬과 재혼했다. 이 두 가지로 평생 죄의식 속에 살았다.(하도 가난하니까 그럴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죄라고 인식하는 것은 당시대 문화적 가치관일 것이다. 또한 사별 후 재혼한 것이 죄라고 인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에서는 죄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는 그 하녀 어머니 소산 7남매중 막내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아이들이 예수님 나이 33살 보다 적은 나이에 죽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큰형(루터교 목사)과 자신을 빼고 큰누나 25살, 둘째누나 33살, 둘째형 12살, 세째형 24살, 바로 위 세째누나 33살에 죽었다. 그러니 집안 분위기는 암울했고 키에르케고르 자신도 33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였었다. 아버지와 성격이 닮아 자신은 저주받은 몸이라고 생각했다. 기묘하게도 키에르케고르란 이름은 덴마크 말로 묘지 무덤이었다. 신을 버리고 한동안(아버지의 양심 고백을 들은 22살-아버지가 사망한 25살) 방탕한, 불안한 삶을 살았다.
17살에 코펜하겐 대학 신학공부 후 27살에 목사고시에 합격한 케에르케고르는 그해 27살에 9살 연하 레기네 올센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약속한 때는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맘대로 되지 않아 불안했다. 28살에 자신은 죄를 안고 태어났기에 레기네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약혼을 파혼한다. 결국 결혼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다.
베를린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공포와 전율", "반복", "철학적 단편",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그리스도교에서의 수련"이라는 책을 쓴다.
목사가 되려고 했지만 그는 저술가가 되어 덴마크 교회가 형식적인 의식에 치중하고 기복적인 성격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대항하여 싸운다. 33살을 넘기고 젊은 나이지만 43살에 죽는다.
플라톤은 완전한 가지계 영원한 이데아의 진짜 세계와 불완전한 가시계 시간과 공간 속 현실의 가짜 세계로 나눴다. 플라톤의 영향 하에 기독교(아우구스티누스 - 어거스틴 등)는 하늘 나라와 이 세상 나라로 해석했다. 칸트는 물자체와 현상 세계로 구분해 보았다. 헤겔은 변증법적 방법론으로 이원론을 절대정신으로 합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비판하며 의지와 표상으로 다시 양분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를 지지하며 영원하고 가능성이 있는 무한한 세계와 시간속의 필연적인 유한한 세계로 구분한다. 보편이성 절대정신과 보편의지를 비판하며, 보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라고 하는 주최, 내가, 개별자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영혼의 나는 무한한 가능성이고, 육체의 나는 유한한 필연성이다고 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러한 두 대립적인 모순 속 인간은 절망한다는 것이다. 이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무지의 절망, 취약한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절망에 대한 반항의 절망이다. 그래서 절망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하지만 견딜 수 있는 길은 있다. 신에 귀의하는 것이다. 신을 믿는 것이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내적으로 믿어지는 것은 사실 불확실한 것이다. 객관적 진리는 참이기에 당연히 믿을 수 있지만 주관적 진리는 내가 믿기 때문에 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주관적 진리가 진짜 진리라고 했다. 신 불신은 나의 자유에 의한 선택이다.
아브라함은 100살에 난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공포와 전율에서 그리고 모리아 산에서의 음성이 신으로부터 들려온 것인지 확정할 수 없어 절망한다. 그러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로 결단하고 행동에 나셨다. 그때 천사가 나타났다. 결국 믿음은 결단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인간은 결단을 통하여 믿음을 갖게 되고 거기서 절망이 극복되는 종교적 실존 상황으로 들어간다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자유가 있어서 결단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절망일 수 있지만, 한편 믿음을 통하여 절망과 불안과 공포를 견디며 극복할 수 있다는 종교적 실존 상태에 인간은 참인간으로 산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키에르케고르는 평생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종교적 실존의 삶을 살았다.
왜 불안한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있기 때문에 절망하고 불안하지만, 그 자유로운 결단에 의하여 신에 귀의하면 그 절망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칼 바르트, 에밀 부룬너, 폴 틸리히, 루돌프 불트만 등등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가치관 사상을 종합하여 쉽게 말하면, 문제있는 우리 자신이 문제있는 상황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을 찾는 길은 신에 귀의하는 것이었다.
본문 성경 예수님 말씀 대로 표현하면, <절망스런 (죄많은)세상 가운데도> "내가 온전한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이다.
3. 본문 마태복음 5장 38-48절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출애굽기 21장 12-27절
12 "사람을 때려서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13 그가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라 실수로 죽였으면, 내가 너희에게 정하여 주는 곳으로 피신할 수 있다.
14 그러나 홧김에 일부러 이웃을 죽인 자는, 나의 제단으로 피하여 오더라도 끌어내서 죽여야 한다.
15 자기 부모를 때린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16 사람을 유괴한 자는,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가 데리고 있든지,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17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18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어느 한 사람이 상대방을 돌이나 주먹으로 때려서, 그가 죽지는 않았으나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19 그가 일어나서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길을 다닐 수 있게 되면, 때린 사람은 형벌을 받지는 않으나, 그 동안에 입은 손해를 갚아 주고, 다 나을 때까지 치료비를 대주어야 한다.
20 어떤 사람이 자기의 남종이나 여종을 몽둥이로 때렸는데, 그 종이 그 자리에서 죽으면, 그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한다.
21 그러나 그들이 하루나 이틀을 더 살면, 주인은 형벌을 받지 않는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22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자를 다치게 하였는데, 낙태만 하고 달리 더 다친 데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반드시 배상금을 내되, 배상금액은 재판관의 판결을 따른다.
23 그러나 그 여자가 다쳤으면, 가해자에게는, 목숨은 목숨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26 어떤 사람이 자기 남종의 눈이나 여종의 눈을 때려서 멀게 하면, 그 눈을 멀게 한 값으로, 그 종에게 자유를 주어서 내보내야 한다.
27 그가 자기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부러뜨리면, 그 이를 부러뜨린 값으로, 그 종에게 자유를 주어서 내보내야 한다."
굉장히 합리적인 법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는 말은 사람이 싸우는 상황에서 임산부를 다치게 하여 낙태한 경우 배상해야 하고, 임산부까지도 다쳤다면 그대로 갚아야 한다는 말이다. 남자가 주권을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구약 때와는 다른, 그래서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동원하여 특별한 논리로 말씀한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임산부, 가해자, 임산부 남편과의 관계에 적용한다면 예수님의 말씀 보상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역발상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수님 말고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행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그런데 이 길은 완벽하다.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누가복음 6장 27,36절로 요약할 수 있다.
27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36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4. 결론
사람들은 사건 사고, 문제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하여 복잡하고 해결이 어려우니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대충 넘어가라 한다.
그러나 법은 "이에는 이"라는 처벌과 그 이상 배상까지 규정한다.
예수님은 그 법의 취지와 정신을 말했다. 회복 불능의 사건 사고나 문제 야기 이전에 그 자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온전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이며 자비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인간은 의지와 한계로 인하여 사랑과 자비 실행이 어렵다. 때문에 신의 가호가 요구된다.
완벽한 신의 도움과 개입이 없이 인간은 스스로 완벽하게 살 수는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점을 깨우쳤다.
때로 실수와 문제와 사건 사고를 저지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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