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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3설교 베드로와 7인의 선교사와 우리 베드로전서 1장 3-9절 본문
20190303설교
베드로와 7인의 선교사와 우리
베드로전서 1장 3-9절
인생은 완전하지 못하고 한계가 있다.
학생이 그냥 학교 가 공부도 않고 어영부영하다가 집에 오는 생활을 하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삶을 살 수 없다. 그냥 살면 무식하게 되어 무능한 삶을 살며 아무런 의미 없이 살게 된다. 허송세월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 만나 하나님의 선교 역사의 인생을 살았다.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는 벳세다 출신이다. 가버나움에서 살았다. 동생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 요한과 함께 어부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 결국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 변화산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예수님이 심문 받을 때 3번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다. 십자가 사건 현장에 있었다. 수많은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부활 후 11차례 나타난 예수님을 7차례 이상 만났다.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사명을 당부 받았다. 예수님 이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중 성령의 임재 가운데 40대에 처음 설교했다. 예수님 보다 30년 이상을 살면서, 네로의 박해 때 70대의 나이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했다.
실라는 바울과 동역했고 바울 사후 베드로를 도왔다.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유대 출신의 로마 시민이었다(행 16:37). 사도는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만났을 것이다. 제1차 예루살렘 총회 결의안을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파송되었다(행 15:22-23). 마가 요한 동행 문제로 바울이 바나바와 헤어지고 2차 선교여행 때부터 바울과 함께 동역했다. 빌립보 감옥에 바울과 함께 투옥당하기도 했다. 바울을 도와 데살로니가 교회를 설립했고 그 교회에 바을과 함께 신약 최초로 편지를 보냈다. 베뢰아와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다(행 17:1, 10;18:5). 바울 순교 후 베드로를 도왔다.
베드로전서
예수 만난 베드로는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 등지 동쪽을 책임 맡고 있었다. 63,4년경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 시기, 바울이 로마에서 1차 구속되어 석방된 후 65년경 실라의 도움을 받아, 바벨론이라 상징되던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은 소아시아(터기)의 살아 있는 돌이요, 택하심을 받은 왕과 같은 거룩한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여러 교회에 베드로전서를 썼다.
예수가 당한 것과 같은 고난과 박해(파데마타, 16회 사용)와 걱정을 하나님께 맡겨 이겨내며 복음으로 자기를 낮추고, 성도가 누리는 기쁨과 영광(26회 언급)으로 소망(4회 표현) 가운데 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전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 같이 고난에도 오히려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라고 한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3-9절, 3장 8절, 4장 12-16절
우리나라 선교 역사
발해와 통일신라시대의 12지신상이나 능묘 앞 페르샤 무인상, 곧 석굴암 전실 양벽의 팔부신장 중 페르샤 무인상, 십일면 관음상, 십나한상, 범천 및 제석천상 등의 옷의 문향(의문)과 발에 신은 샌들, 손에 든 유리잔, 그리고 1955년 발견된 불국사 경내서 발견된 돌로 된 십자가 등으로 볼 때, 키릴루스에 의해 파문당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주의자, 곧 신을 낳은 마리아 테오토코스가 아니라 인성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 크리스토코스를 주장한 네스토리우스의 경교가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온 후 불교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 12월 27일에 일본군인을 따라 가톨릭 종군신부 세스페데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톨릭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1816년(순조 16년) 영국 견중사절 암허스트 경을 호위하고 중국에 왔다가 서해안 해도 작성차 내항한 영국 군함 알세스트 호의 함장 바실 홀 대령은 9월 4일 비인만 서천 마량진 앞 갈곳 아래 정박했다가 마량진 첨사 조대복에게 성서를 우리나라 최초로 증여하였다.
1832년 2월 독일 신교 선교사 귀쯜라프 목사는 장산곳과 군산만에서 한문성서와 교리서를 나누면서 선교하고 돌아갔다. 다시 중국 선교를 하고 영국 동인도회사의 암허스트호 선장 린드세이의 친구이자 의사로 1832년 7월 17일 백령도 부근에서 그리고 그 후 충청도 홍주 고대도 안항에 도착해 한문성서를 전했고 한글 성서 번역을 최초로 시도하였다. 그는 충청도 일원에 감자종자를 나누어 주고 심는 법과 저장법을 알려주어 감자가 충청도 일원에 퍼졌으며 홍주 목사등의 도움으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865년 9월 4일 영국의 중국 선교사 토마스 목사는 황해도 근포에 도착하여 성서와 역서를 전하고 선교했다. 백령도 장산곳 석도를 거쳐 대동강 소상 장사포 석호정에서 그리고 평양성 만경대에서 성서를 반포하였다. 선교를 위한 제네널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양각도 옆 쑥섬에서 참수당하였다. 그의 선교와 순교로 평양교회, 안주교회, 널다리교회가 세워졌다.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 목사는 1873년 중국의 북한 근접 고려문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선교했고, 1874년 이응찬을 만나 우리 글을 배우고 이응찬의 친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은 로스의 동료 선교사 매킨타이어 목사와 병원장의 어학선생이 되었고, 그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우장과 봉천 등에서 1875년 예수성교문답, 예수성교요령을 한글로 편찬하고 성서 번역작업을 하였다. 1882년 한국 최초 한글 성서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간행되었다. 1883년 교정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합본 간행, 요한복음 재간되었으며, 번역작업에 동참한 서상륜은 1883년 서울로 파견되어 전도하게 되었다. 1883년 존 로스 목사의 번역을 도왔던 서상륜, 그의 동생 서경조,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 등 10명이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가 황해도 송천리에 창설되었다. 1884년 존 로스 목사가 외교고문관 묄렌돌프에게 건네진 성경으로 전도사업이 활발해졌다. 1884년 마가복음 마태복음이 간행되어 중국 즙안현 한인촌에서 판매되었으며 수십명에에 세례를 주었다. 1885년 로마인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간행되었고, 1887년 로스번역본 예수성교전서라는 신약 전권이 간행되었다.
이수정과 미국 선교부와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라 스크랜튼
이수정은 일본 유학 중 성서번역하며 유학생들에게 전도를 했고 1884년 일본 한인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이수정의 영향으로 김옥균도 선교사들과 접촉하고 우리나라에 기독교 도입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종두법을 도입한 박영선도 개종하였고, 이수정은 미국 선교사들에게 우리나라 선교를 요청하였다. 그에 의해
1884년 9월 20일 알렌 의료선교사 내한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라 부부(예수교학당과 배재학당 창설) 내한
1885년 5월 1일 스크랜튼 부부(이화학당 창설)와 그 어머니 내한
1885년 6월 21일 의료선교사 헤론이 내한하여 선교하였다.
1885년 2월 알렌은 광혜원(3월 12일 제중원으로 개명) 개설하였다.
1887년 스크랜튼은 정동에 병원을 개설했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에 의해 새문안교회, 아펜젤라에 의해 정동교회가 세워졌다.
1894년 숭실학당 숭의여학교 광성학교가 창설되었고 마펫에 의해 널다리교회 창설되었다.
1899년 미국 실업가 세브란스의 기부로 병원을 건축하고 1904년 9월 세브란스 병원으로 고쳐 한국 최초의 종합병원이 개설되었다.
1906년 숭실대학과 세브란스의학과, 1909년 이화학당 안에 대학부, 1915년 연희전문학교 등
1910년까지 823개 기독교학교가 세워졌다.
언더우드와 7인의 전주 선교 사역
1885년에 들어온 언더우드는 1891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 윤치호와 함께 맥코민 신학교에서 선교보고 및 강연을 한다. 이때 감동받은 테이트, 레이놀즈와 존슨 그리고 존슨에 의해 젠킨이 한국 선교 결단을 한다.
1892년 7인의 선교사 테이트(최의덕)와 여동생 매티(최마태), 레이놀즈(이눌서)와 부인 볼링, 젠킨(전위렴)과 레이번(서문교회 종탑 기증), 그리고 데이비스(해리슨 선교사와 결혼)가 전주에서 와서 선교를 한다.
1893년 레이놀즈에 의해 서문교회 창설되었다.
1898년 마티 잉골드 여사에 의해 서문 밖 은송리에 진료소가 개설되어 예수병원으로 발전했다.
1900년 4월 24일 매티에 의해 전주여학교가 설립되고, 1902년 9월 미국 남장로교 여선교사 전킨(전마리아)이 여자청년학교를 화산동에 학생 10명으로 개설하였다. 1907년 9월 전주기전여학교로 개칭되었다.
1900년 9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이눌서)의 사택에서 신학문당을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김창국 학생 한 명을 대상으로 한글과 셈본 등을 가르치다가 1904년 해리슨(하위지)의 사택으로 이전하면서 교사 5명, 학생 10여 명으로 체계를 갖추어 신흥학교로 발전하였다.
인생은 완전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방치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도움(말씀)을 받아 살아야 한다.
사람마다 각기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 살면서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다. 우리 믿는 사람은 무한한 조건과 역사와 각자의 유전자에 의하여 삶을 살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인생이 결정된다고 믿고 그 믿음으로 산다. 인간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의지와 목적으로 사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어떤 목적으로 맘을 먹고 사느냐가 중요하다. 그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주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 그를 위한 목적으로 로마에 까지 가서 고난 속에 살았지만 고난 한계 불완전을 오히려 감내하며 당당하게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실라도 바울도, 우리나라에 선교한 선교사들도, 특별히 전주의 7인의 선교사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난 가운데 자신들의 인생을 전주에 바쳤다. 오늘 우리들에게 복음이 전달되도록 한 것이며 우리가 예수 믿고 소망 가운데 살게 한 것이다.
인생 가운데 무한한 변수들로 만들어지는 다 이해하지 못하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현실의 한계 불완전 어려움을 이겨내며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흔적으로 역사로 이 세상에 남아 사람들이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사는 여러분 되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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