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블로그
20190310 #부르셔서 선택받은 사람 #베드로후서 1장 3-11절 본문
20190310설교
부르셔서 선택받은 사람
베드로후서 1장 3-11절
봄비다.
김일성 외가 10촌 동생, 강성산 총리, 강양옥 목사 조카, 이제만나러갑니다에 출연한 강명도 교수의 장신대 신대원 졸업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불신자였으나 신자가 되어 북한선교를 위한 사명을 깨달았다. 기독교 집안 내력이 있었으나 북한 사회주의 독재체제에서 종교를 인정하지 않다가 자신의 인생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을 깨달은 것이다. 존재와 존재 이유, 목적을 깨달은 것이다. 사명을 인식한 것이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 유사성과 배경
베드로후서 2장 1-17절과 유다서 4-13절을 비교해보자.
베드로전서 2장 1-17절
1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난 것과 같이, 여러분 가운데서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로 이끄는 이단을 몰래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님을 부인하고, 자기들이 받을 파멸을 재촉할 것입니다.
2 많은 사람이 그들을 본받아서 방탕하게 될 것이니,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입니다.
3 또 그들은 탐욕을 품고, 그럴 듯한 말로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털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파멸이 반드시 그들에게 닥치고 말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서, 그들을 사슬에 묶어 심판 때까지 어둠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5 그분은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 그 때에 그분께서는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 노아와 그의 가족 일곱 사람만을 살려 주셨습니다.
6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두 성을 잿더미로 만들고 멸망시키셔서, 후세에 경건하지 않을 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7 그러나 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행동 때문에 괴로움을 겪던 의로운 롯은 구해 내셨습니다.
8 그것은 의인인 그가 그들 가운데 살면서 보고 듣는 그들의 무법한 행실 때문에, 날마다 그의 의로운 영혼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9 주께서는 경건한 사람을 시련에서 건져 내시고, 불의한 사람을 벌하셔서, 심판 날까지 가두어 두실 것입니다.
10 특히 더러운 정욕에 빠져서 육체를 따라 사는 자들과, 권위를 멸시하는 자들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대담하고 거만해서,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이들을 모욕하면서도, 두려운 줄 모릅니다.
11 천사들은 그들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 앞에서 그들을 헐뜯어 고발하지 않습니다.
12 그러나 그들은 본래 잡혀서 죽으려고 태어난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아서,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비방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 짐승들이 멸망하는 것같이,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13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불의의 값으로 해를 당합니다. 그들은 대낮에 흥청대면서 먹고 마시는 것을 낙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티와 흠투성이입니다. 그들은 여러분과 연회를 가질 때에도, 자기들의 속임수를 즐깁니다.
14 그들의 눈에는 음녀만 보입니다. 그들은 죄 짓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들뜬 영혼들을 유혹하며, 그들의 마음은 탐욕을 채우는 데 익숙합니다. 그들은 저주의 자식들입니다.
15 그들은 바른 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갔습니다. 불의의 삯을 사랑한 보솔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16 그러나 발람은 자기가 지은 죄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음성으로 말해서, 이 예언자의 미친 행동을 막은 것입니다.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입니다. 그들에게는 캄캄한 어둠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유다서 4-13절
4 어떤 침입자들이 여러분 가운데 몰래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정죄를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로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해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5 여러분이 이미 다 알겠지만, 내가 다시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 드리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께서는 백성을 이집트에서 한 번 결정적으로 구원해 내시고서, 그 다음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습니다.
6 또 자기네가 통치하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그 큰 날의 심판에 붙이시려고, 영원한 사슬로 매어서 어둠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7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의 성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음란함에 빠져서 다른 육체를 좇았으므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8 이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몽상에 빠져서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9 천사장 미가엘은 모세의 시체를 놓고 악마와 다투면서 논쟁을 할 때에, 차마 모욕적인 말로 단죄하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만 말하였습니다.
10 그런데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욕합니다. 그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이, 무엇이든지 본능으로만 알고, 바로 그 일로 멸망합니다.
11 그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인의 길을 걸었으며, 삯을 바라서 발람의 그릇된 길에 빠져들었으며, 고라의 반역을 따르다가 망하였습니다.
12 이 사람들은 자기들만을 생각하면서, 염치없이 먹어 대므로, 여러분의 사랑의 식탁을 망치는 암초입니다. 그들은 바람에 밀려다니는 구름 곧 비를 내리지 않는 구름이요, 가을이 되어도 열매 하나도 맺음이 없이 죽고 또 죽어서 뿌리째 뽑힌 나무요,
13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요, 길을 잃은 별들입니다. 짙은 어둠이 영원히 그들에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두 책은 상당부분의 어휘들이 같다. 유다서는 간단하다.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유다서 보다 확장되었고 덧붙여졌으며 복잡하다. 두 책 다 그들 이단 영지주의에 대한 교우들의 경계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후서가 유다서를 참고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베드로후서는 베드로가 죽기 전인 65년경 이전에 써진 것이 아니고 유다서가 영지주의가 만연한 75-90년경 써졌기 때문에 90년경 써졌을 것이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베드로전서와 달리 베드로의 이름을 빌렸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정경으로 인정되기는 했지만 사도적 권위가 없었기 때문에 정경으로 인정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떻든 두 책은 결론적으로 영지주의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영지주의와 기독교와 베드로후서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플라톤의 이원론, 피타고라스 모나드의 수이론에서 초기적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1세기 말 시몬 마구스 등에 의해 구체화되었으며, 바실리데스, 오늘날 발렌타인데이 유래자인 발렌티누스 등으로 이어져 2세기에는 본격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불완전한 신인 야훼나 제우스 같은 데미우르고스가 완전한 신의 영(프네우마)을 이용해 물질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참된 지식인 영적인 신비를 앎(그노시스)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노시스를 통해 인간의 참된 기원이 지고한 신성(神性)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의 성품 중 영적 요소는 물질계를 벗어나야 자유롭게 된다는 주장이다.
초기기독교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지만 도전이었다. 요한복음과 서신들이 그 대표적이고, 이스가리옷 유다복음서가 있을 정도였다. 어떤 영지주의는 예수가 구세주 메시아가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인 셋이나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정립된 4세기에는 거의 전멸했다. 그렇게 사라졌던 영지주의는 최근 1945년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으로 재부각 되었다. 도마복음서 등등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것이다. 기독교는 이들 영지주의 이단과의 싸움에서 그 기반을 분명하게 다졌다.
결국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로 당시 사람들은 갈렸다. 정통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삐뚤어진 영지주의자로 살 것인가?에서 분명한 선택을 하라는 말씀이 베드로후서의 말씀이다. 거짓교사가 나타나고 이단 사상이 나타날 때, 그것들에서 교회를 지켜내려는 것이었다.
베드로후서의 내용은 사도들의 명백한 증언 회상이다(1,16). 이단들이 별의 별 주장을 하지만 사도들이 예수님을 보고 인식한 것을 상기시켜 그런 이단들의 주장이 잘못임을 말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확증된 구약 메시야적 예언을 지적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곧 오리라던 예수님의 재림이 더딘 것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기에 재림을 그릇 해석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1,19-21). 그래서 지금까지 붙잡고 왔던 굳은 신념과 생활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총과 참된 지식으로 점점 더 성숙하라는 말씀이다.
존재와 이유, 예수와 사역과 해석
오캄의 면도날, 베이컨의 경험주의, 데카르트의 분석에 의한 수이론 등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그것들을 분석해 보자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러한 만물의 존재는 그냥 요소들의 결합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단순히 물질들의 총화 자체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들은 각각이 다 의미와 뜻과 목적과 용도를 가지고 있다. 존재의 이유가 있다. 다양하고 무한하기도 하지만 존재 목적과 뜻과 이유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먼저 존재를 이해하고 그 존재의 목적 등을 분명히 이해야한다.
예수는 셋이 아니고 마니가 아니다.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으며 목수였다. 야고보,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었고, 그리고 누이가 있었다(마13,55, 막6,3, 행1,14). 인간이었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물론 우리 믿는 사람들도 성령에 의하여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지만, 그런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베드로가 먼저 보고 믿었다는 것이다(마16,16, 막8,29, 눅9,20). 갈릴리 사역을 하다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변화산 위에서 나타나 말씀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고(마17,5, 막9,7, 눅9,35)하는 것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보았다는 말이다. 그 외도 수많은 사도들과 제자들에 의해서 갈릴리 예수는 확증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전도하며 증언한 것을 기록한 사도행전 17:3, “그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에서와 같이 단순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우리들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셨던 분이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을 바울이 인식하여 기독교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가 아닌 주장이나 의미나 목적이나 이유나 뜻들은 다 이단적인 주장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를 반영하고 있는, 바울과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말씀과 증언을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벧후1,20,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아무도 성경의 모든 예언을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며 당시의 이단들의 잘못된 해석과 주장을 저자는 경계했다. 벧후3:16, “바울은 모든 편지에서 이런 것을 두고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거나 믿음이 굳세지 못한 사람은,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이라고 덧붙였다
결론, 부름 받아 선택받고 구원받는 믿는 사람
사람마다 존재하고 사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명과 임무가 있고 목적이 있으며 분명한 의미가 있다. 그것에 충실한 삶을 살지 않으면 허송세월하는 것이고, 무생물이나 동물보다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이다. 물론 오해하거나 잘못 이해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자기 욕망과 거짓된 것을 위하여 오도시키면 그 사람은 헛된 삶을 사는 것이고 심판을 받게 된다.
오늘 우리는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각자는 다 예수님이 그냥 이 세상에 나사렛 사람으로 산 것이 아니고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산 것처럼 각자의 사명과 역할을 하며 각자의 목적,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산다. 해석된 삶이다. 이렇게 해석된 삶이 기독교 삶이다. 이에서 벗어나 잘못된 해석을 하며 다른 것을 보는 것은 다른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부름받고 선택받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다. 문제가 많고 한계가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진실한 하나님을 믿고 사는 나의 사명을 다하며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0324 #본능과 믿음 #유다서 1장 17-23절 (0) | 2019.03.24 |
---|---|
20190317설교 생명을 위한 독소 제거 요한2서 1장 4-11절 (0) | 2019.03.17 |
20190303설교 베드로와 7인의 선교사와 우리 베드로전서 1장 3-9절 (0) | 2019.03.03 |
20190224설교 선하거나 악하거나 야고보서 2장 14-26절 (0) | 2019.02.24 |
20190217설교 영원한 나라의 모형 히브리서 10장 19-25절 (0) | 2019.02.17 |